[고전 해학] 스스로 터득한 지혜 - 강희맹(姜希孟)
(1) 옛날에 어떤 도둑이 있었다. 그는 아들에게 자기의 기술을 모두 가르쳐 주었다.
얼마 후, 아들은 자기의 재주가 아버지보다 낫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훔치러 들어갈 때면 늘 아버지보다 앞서 들어갔고, 나올 때에는 아버지보다 나중에 나왔으며, 보잘것 없는 것은 버리고 값진 것만 가지고 나왔다.
게다가 귀는 멀리서 나는 작은 소리도 잘 들을 수 있었고, 눈은 어둠 속까지 꿰뚫어 볼 수 있었다.
(2) 마침내 여러 도둑들이 그를 칭찬하자, 아들 도둑은 슬그머니 자만심이 생겼다.
그래서 어느 날 아버지에게 자랑삼아 이렇게 말했다.
˝이제 저의 기술은 아버지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습니다. 게다가 힘도 아버지보다 더 세니, 이런 실력(實力)이면 무슨 일인들 못 하겠습니까?˝
그러자 아비 도둑이 말했다.
“아직 멀었다. 지혜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터득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 터득한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너는 아직 멀었다.”
아들이 대들었다.
“도둑질에서는 얼마나 재물(財物)을 많이 훔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제가 훔친 것이 아버지가 훔친 것의 배가 됩니다. 게다가 저는 아직 젊습니다. 훗날 아버지 연세가 되면,틀림없이 놀라운 경지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에 아비가 다시 말했다.
“아직 멀었다. 내가 가르친 기술로는 경비가 삼엄한 성에도 쉽게 들어갈 수 있고, 숨겨 둔 보물도 쉽게 찾을 수 있지만, 한번 일이 잘못되는 날에는 영락없이 곤란한 처지에 빠지고 말 것이다. 임기응변(臨機應變)으로 그것을 벗어나려면 스스로 터득한 지혜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너에게 멀었다고 하는 것이다.”
(3)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의 말에 수긍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튿날 밤, 아들을 데리고 어떤 부잣집 곳간에 숨어 들어갔다.
아들이 정신 없이 보물을 챙기고 있을 때 아비 도둑이 밖에서 문을 닫고 자물쇠를 잠가 버렸다. 그리고는 일부러 자물쇠 잠그는 소리를 내어 주인에게 들리게 했다.
(4) 주인은 도둑이 든 줄을 알고 나와 곳간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자물쇠가 그대로 잠겨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곳간 속에 갇힌 아들은 빠져 나올 도리가 없었다.
아들 도둑은 할 수 없이 손톱으로 곳간 문을 박박 긁으며 쥐 소리를 냈다.
안으로 들어갔던 주인은 속으로 중얼거렸다.‘곳간 속에 쥐가 든 게 틀림 없다. 가만 두었다가는 물건을 망칠 터이니 쫓아 버려야겠구나.’
(5) 주인이 자물쇠를 열고 곳간에 막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이 때를 기다렸던 아들은 잽싸게 뛰쳐나와 도망치기 시작했다.
주인이 놀라 소리치자, 가족들이 모두 나와 함께 도둑을 쫓았다.
다급해진 아들은 연못을 끼고 달리다가 연못 속에 커다란 돌을 던졌다.
그러자 쫓아오던 사람들은 도둑이 연목 속으로 뛰어 든 줄 알고 모두 연못을 에워싸고 도둑을 찾았다.
그 틈에 아들은 그 곳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6) 집에 돌아온 아들은 아버지를 보고 원망했다.
“새나 짐승도 제 애들을 돌볼 줄 아는데, 아버지는 제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그 지경에 이르도록 하셨습니까?”
(7) 이 말을 들을 아비가 말했다.
“이제부터 너는 세상에서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뛰어난 도둑이 되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기술이라는 것은 대개 다른 사람에게서 얻은 것이기 때문에 한계(限界)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스스로 터득한 지혜는 그렇지 않아서 그 응용이 무궁무진하다.
특히, 사람들이 곤경에 처하여 막막하게 되면 도리어 그 어려움이 그 사람의 의지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고 , 그의 어진 마음도 더 성숙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너를 곤경에 처하게 한 까닭은 장차 너를 안전하게 하고자 해서이며, 내가 너를 함정에 빠지게 한 것은 장차 너를 위험에서 건지고자 해서이다.
만약, 네가 곳간에 갇히지 않고, 또 쫓기는 신세(身世)가 되어 보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쥐 소리를 낼 생각을 했겠으며, 돌을 연못에 던지는 기지를 발휘할 수 있었겠느냐?
궁지에 몰리자 지혜를 짜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지혜의 샘이 한 번 열리기 시작하면 다시 또 곤궁에 처하게 되어도 혼미해 지지 않을 것이니, 이제 너는 틀림없이 세상에서 으뜸 가는 도둑이 될 것이다.˝ (혼미)
(8) 후에 아들은 정말 세상에서 겨를 사람이 없는 도둑이 되었다.
도둑질이란 세상에서 지극히 천하고 악한 기술이지만, 그것도 스스로 터득한 다음에야 비로소 세상에서 으뜸 가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물며 학문(學問)의 길에 있어서야 더 말해서 무엇하겠느냐?
(9) 아들아, 네 처지가 이와 비슷하니, 곳간에 갇히고 쫓기는 것과 같은 어려움에 처하게 되더라도 그 가운데서 스스로 지혜를 터득해야 한다. 소홀히 생각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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