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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스크랩] 류시화 시인의 2집_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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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화 시인의 2집 >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소금

소금이
바다의 상처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소금이
바다의 아픔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상의 모든 식탁 위에서
흰 눈처럼
소금이  떨어져내릴 때
그것이 바다의 눈물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눈물이 있어
이 세상 모든 것이
맛을 낸다는 것을

 

들풀

들풀처럼 살라
마음 가득 바람이 부는
무한 허공의 세상
맨 몸으로 눕고
맨 몸으로 일어서라
함께 있되 홀로 존재하라
과거를 기억하지 말고
미래를 갈망하지 말고
오직 현재에 머물라
언제나 빈 마음으로 남으라
슬픔은 슬픔대로 오게 하고
기쁨은 기쁨대로 가게 하라
그리고는 침묵하라
다만 무언가의 언어로
노래 부르라
언제나 들풀처럼
무소유한 영혼으로 남으라

 

나비

달이 지구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지구에 달맞이꽃이 피었기 때문이다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이제 막 동그라미를 그려낸
어린 해바라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세상은
나비 한 마리로 내게 날아온다
내가 삶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너에 대한 그리움 때문
지구가 나비 한 마리를 감추고 있듯이
세상이 내게서
너를 감추고 있기 때문

파도가 바다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그 속에서 장난치는 어린 물고기 때문이다
바다가 육지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모래에 고개를 묻고 한 치 앞의 생을 꿈꾸는
늙은 해오라기 때문이다

아침에 너는 나비 한 마리로
내게 날아온다
달이 지구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나비의 그 날개짓 때문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너에 대한 내 그리움 때문

 

꽃등

누가 죽었는지
꽃집에 등이 하나 걸려 있다
꽃들이 저마다 너무 환해
등이 오히려 어둡다, 어둔 등 밑을 지나
문상객들은 죽은 자보다 더 서둘러
꽃집을 나서고
살아서는 마음의 등을 꺼뜨린 자가
죽어서 등을 켜고 말없이 누워 있다
때로는 사랑하는 순간보다 사랑이 준 상처를
생각하는 순간이 더 많아
지금은 상처마저도 등을 켜는 시간

누가 한 생애를 꽃처럼 저버렸는지
등 하나가
꽃집에 걸려 있다

 

서시

- 어느 인도 시인의 시를 다시 씀 -


누가 나에게
옷 한벌을 빌려 주었는데
나는 그 옷을
평생동안 잘 입었다
때로는 비를 맞고
햇빛에 색이 바래고
바람에 어깨가 남루해졌다
때로는 눈물에 소매가 얼룩지고
웃음에 흰 옷깃이 나부끼고
즐거운 놀이를 하느라
단추가 떨어지기도 했다
나는 그 옷을 잘 입고
이제 주인에게 돌려준다

 

수선화

여기 수선화가 있다, 남몰래
숨겨 놓은 신부가

나는 제주 바닷가에 핀
흰 수선화 곁을 지나간다
 
오래 전에 누군가 숨겨 놓고는 잊어 버린
신부 곁을

 

물안개

세월이 이따금 나에게 묻는다
사랑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안개처럼
몇 겁의 인연이라는 것도
아주 쉽게 부서지더라

 

소금별

소금별에 사는 사람들은
눈물을 흘릴 수 없네
눈물을 흘리면
소금별이 녹아 버리기 때문
소금별 사람들은
눈물을 감추려고 자꾸만
눈을 깜박이네
소금별이 더 많이 반짝이는 건
그 때문이지

 

저편 언덕

슬픔이 그대를 부를 때
고개를 돌리고
쳐다보라
세상의 어떤 것에도 의지할 수 없을때
그 슬픔에 기대라
저편 언덕처럼
슬픔이 그대를 손짓할 때
그곳으로 걸어가라
세상의 어떤 의미에도 기댈 수 없을 때
저편 언덕으로 가서
그대 자신에게 기대라
슬픔에 의지하되
다만 슬픔의 소유가 되지 말라

 

뮤직박스

나 어렸을 때
뮤직박스 하나를 갖고 있었다
태엽을 감으면 음악이 흘러나오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집착했던 것
유리상자 안의 인형이
음악에 맞처 빙글빙글 돌아가는
내 머리맡에 늘 놓여 있던
뮤직박스
나 잠이 들면
세상 전체가 뮤직박스가 되어
별자리들의 음악에 맞춰
끝없이 돌아가곤 했다
그것이 곁에 있을 때
나는 슬픔을 잊었다

나는 나이를 먹고
뮤직박스는 어느새 내 곁을 떠났다
그리고 나는 이 생에서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집착했다
당신이 곁에 있을 때
나는 세상 모든 것을 잊었다
당신이 내 태엽을 감으면
나는 음악에 맞춰 빙글빙글 돌아가는
뮤직박스 속의 인형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당신은
그 뮤직박스를 버렸다
아무도 태엽을 감아 주는 이 없이
춤을 추던 그 동작 그대로
나는 영원히 정지해 있다

 

질경이

그것은 갑자기 뿌리를 내렸다, 뽑아낼 새도 없이
슬픔은
질경이와도 같은것
아무도 몰래 영토를 넓혀
다른 식물의 감정들까지 건드린다

어떤 사람은 질경이가
이기적이라고 말한다
서둘러 뽑아 버릴수록 좋다고
그냥 내버려 두면 머지않아
질경이가
인생의 정원을 망가뜨린다고

그러나 아무도 질경이를 거부할 수는 없으리라
한때 나의 삶에서
슬픔에 의지한 적이 있었다
여름이 가장 힘들고 외로웠을 때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슬픔만이 있었을 뿐
질경이의 이마 위로
여름의 태양이 지나간다
질경이는 내게
단호한 눈짓으로 말한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또 타인으로부터
얼마만큼 거리를 두라고
 
얼마나 많은 날을 나는
내 안에는 방황했던가
8월의 해시계 아래서 나는
나 자신을 껴안고
질경이의 영토를 지나왔다
여름의 그토록 무덥고 긴 날에

 

나무는

나무는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쓴 걸까
그러나 굳이 바람이 불지 않아도
그 가지와 뿌리는 은밀히 만나고
눈을 감지 않아도
그 머리는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있다

나무는
서로의 앞에서 흔들리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 걸까
그러나 굳이 누가 와서 흔들지 않아도
그 그리움은 저의 잎을 흔들고
몸이 아프지 않아도
그 생각은 서로에게 향해 있다

나무는
저 혼자 서 있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 걸까
세상의 모든 새들이 날아와 나무에 앉을 때
그 빛과
그 어둠으로
저 혼자 깊어지기 위해 나무는
얼마나 애를 쓰는 걸까

 

패랭이꽃

살아갈 날들보다
살아온 날이 더 힘들어
어떤 때는 자꾸만
패랭이꽃을 쳐다본다
한때는 많은 결심을 했었다
타인에 대해
또 나 자신에 대해
나를 힘들게 한 것은
바로 그런 결심들이였다
이상하지 않은가 삶이란 것은
자꾸만 눈에 밟히는
패랭이꽃
누군가에게 무엇으로 남길 바라지만
한편으론 잊혀지지 않은 게 두려워
자꾸만 쳐다보게 되는
패랭이꽃

 

비로 만든 집

비로 만든 집에서
나는 살았네
안개로 만든 집
구월의 오솔길로 만든 집
구름비나무로 만든 집

비로 만든 집에서 언제나
비가 내리지
비를 내리는 나무
비를 내리는 길
비를 내리는 염소들

세상의 슬픔으로 다가올 때마다 나는
그곳으로 가서 비를 맞았네
비의 새가 세상의 지붕 위를 날고
비를 내리는 오솔길이
비의 나무를 감추고 있는 곳

비로 만든 집에서
나는 살았네
비의 새가 저의 부리로
비를 물어 나르는 곳
세상 어디로도 갈 곳이 없을 때 나는
그곳으로 가서 비를 맞았네

비로 만든 집에는
언제나 비가 내리지
비를 내리는 나무
비를 내리는 길
비를 내리는 염소들

 

무궁동

인생은 끝이 없는 움직임
사랑 또는 이별하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날개짓
나는 그 자리에 정지해 있기 위해
무한히 움직인다
내게 다가와 입술만 허락하고 도망치는
희망
아니면 바다처럼 항상 거기 있으면서
끝없는 운동으로 나를 거부하는

무궁동
내 마음처럼 그렇게
끝이 없는 움직임은 없으리라
언제나 너에게로 달려가는
내 부질없는
마음
한 생각에서 끝없이 다른 생각으로 이동하는
그런 고독은 없으리라
 
오래 망설이다가
해오라기처럼
아니면 슬픔 때문에 참을성이 없어진
한 마리 물고기처럼
끝없이 떨고 있는
내 마음

차라리 나는 자유를 버리리라
비늘을 가르는 아픔으로 헤엄치다가
이제는 모래 침대 위에 누운
흰 물고기뼈가 되리라
나는 이제 그만 멈추고 싶다
무궁동

 

입술 속의 새

내 입술 속의 새는 너의 입맞춤으로
숨막혀 죽기를 원한다
 
내가 찾는 것은
너의 입술
그 입술 속의 새
길고 긴 입맞춤으로 숨 막혀 죽는 새
나는 슬픔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너를 껴안는다
내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삶은 다만 그림자
살낱 같은 여름 태양 아래 어른거리는
하나의 환영
그리고 얼만큼의 몸짓
그것이 전부
나는 고통 없는 세계를 꿈꾸진 않았다
다만 더 이상 상처받는 일이 없기를

내가 찾는 것은 너의 입술
단 한 번의 입맞춤으로
입술 속에서
날개를 파닥이며 숨 막혀 죽는 새
밤이면 나는 너를 껴안고
잠이 든다 나 자신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온 몸으로 너를 껴안고
내 모든 걸 잊기 위해

 

짧은 노래

벌레처럼
낮게 엎드려 살아야지
풀잎만큼의 높이라도 서둘러 내려와야지
벌레처럼 어디서든 한 철만 살다 가야지
남을 아파하더라도
나를 아파하진 말아야지
다만 무심해야지
울 일이 있어도 벌레의 울음만큼만 울고
허무해도
벌레만큼만 허무해야지
죽어서는 또
벌레의 껍질처럼 그냥 버려져야지

 

나무의 시

- 아들 미륵이에게 -

나무에 대한 시를 쓰려면 먼저
눈을 감고
나무가 되어야지
너의 전 생애가 나무처럼 흔들려야지
해질녘 나무의 노래를
나무 위에 날아와 앉는
세상의 모든 새를
너 자신처럼 느껴야지
네가 외로울 때마다
이 세상 어딘가에
너의 나무가 서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지
그리하여 외로움이 너의 그림자만큼 길어질 때
해질녘 너의 그림자가 그 나무에 가 닿을때
넌 비로소 나무에 대해 말해야지
그러나 언제나 삶에 대해 말해야지
그 어떤 것도 말고

 

무언가

나는 벽돌의 감방 속에 갇힌 적이 없다
손바닥만한 창문으로 오월 하늘은 내다보며
무언의 노래를 불러 본 적이 없다
종달새처럼 비상하기 위해
불안하게 날개를 퍼덕인 적은 있었다
그것도 젊은 시절의 일이었다
그러므로 난 장인인 체하지는 않으리라
바람처럼 쉽게 초월의 노래를 부르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난 내 삶 자체가
무언의 노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육체를 가두는 일보다 영혼을 가두는 일이
더 무섭다는 걸 난 잊지 않았다
보리밭 위로 날아오르는 종달새처럼
나는 누구의 것도 되지 않으리라
아무도 내 삶을 기억하지 않을지라도

 

첫사랑

이마에 난 흉터를 묻자 넌
지붕에 올라갔다가
별에 부딪힌 상처라고 했다

어떤 날은 내가 사다리를 타고
그 별로 올라가곤 했다
내가 시인의 사고방식으로 사랑을 한다고
넌 불평을 했다
희망 없는 날을 견디기 위해서라고
난 다만 말하고 싶었다

어떤 날은 그리움이 너무 커서
신문처럼 접을 수도 없었다

누가 그걸 옛 수첩에다 적어 놓을 걸까
그 지붕 위의
별들처럼
어떤 것이 그리울수록 그리운 만큼
거리를 갖고 그냥 바라봐야 한다는 걸

 

저녁의 꽃들에게

연필이 없다면 난
손가락으로
모래 위에 시를 쓰리라

내게서 손가락이 사라진다면
입술로
바람에게 시를 쓰리라

입술마저 내게서 가버린다면 난
내 혼으로
허공에다 시를 쓰리라

내 혼이 어느날 떠나간다면
아, 그런 일은 없으리라
난 아직 살아 있으니까

 

거리에서

거리에서
한 남자가 울고 있다
사람들이 오가는 도시 한복판에서
모두가 타인인 곳에서
지하도 난간 옆에 새처럼 쭈그리고 앉아
한 남자가 울고 있다
아무도 그 남자가 우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아무도 그 눈물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거리에서 한 남자가 울고 있다
한 세기가 저물고
한 세기가 시작되는 곳에서
모두가 타인일 수 밖에 없는 곳에서
한 남자가 울고 있다
신이 눈을 만들고 인간이 눈물을 만들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 역시 그가 우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나는 다만 그에게
무언의 말을 전할 수밖에 없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눈물이라고

 

인간으로 태어난 슬픔

넌 알겠지
바닷게가 그 딱딱한 껍질 속에
감춰 놓은 고독을
모래사장에 흰 장갑을  벗어 놓는
갈매기들의 무한 허무를
넌 알겠지
시간이 시계의 태엽을 녹슬게 하고
꿈이 인간의 머리카락을 희게 만든다는 것을

내 마음은 바다와도 같이
그렇게 쉴새없이 너에게로 갔다가
다시 뒷걸음질 친다
생의 두려움을 입에 문 한 마리 바닷게처럼

나는 너를 내게 달라고
물 속의 물풀처럼 졸라댄다
내 마음은 왜
일요일 오후에
모래사장에서 생을 관찰하고 있는 물새처럼
그렇게 먼 발치서 너를 바라보지 못할까

넌 알겠지
인간으로 태어난 슬픔을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을 사랑하는
무한 고독을
넌 알겠지
그냥 계속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것을
그것만이 유일한 진실이라는 것을

 

시월의 시

그리고는 가을 나비가 날아왔다
아, 그렇게도 빨리
 
기억하는가
시월의 짧은 눈짓을

서리들이 점령한 이곳은
이제 더 이상 태양의 영토가 아니다
곤충들은 딱딱한 집을 짓고
흙 가까이
나는 몸을 굽힌다

내 혼은 더욱 가벼워져서
몸을 거의 누르지도 않게 되리라

 

별에 못을 박다

어렸을 때 나는
별들이 누군가 못을 박았던
흔적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다

별들이 못구멍이라면
그건 누군가
아픔을 걸었던
자리겠지

 

두 사람만의 아침

나무들 위에 아직 안개와
떠나지 않은 날개들이 있었다
다하지 못한 말들이 남아
있었다 오솔길 위로
염소와 구름들이 걸어왔지만
어떤 시간이 되었지만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사람과
나는, 여기 이 눈을 아프게 하는 것들
한때 한없이 투명하던 것들
기억 저편에 모여 지금
어떤 둥근 세계를 이루고 있는 것들
그리고 한때 우리가
빛의 기둥들 사이에서 두 팔로
껴안던 것들

말하지 않았다 그 사람과
나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한때 우리가 물가에서
귀 기울여 주고받던 말들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가고

새와 안개가 떠나간
숲에서 나는 걷는다 걸어가면서
내 안에 일어나는 옛날의 불꽃을
본다 그 둘레에서
두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숲의 끝에 이르러
나는 뒤돌아본다

 

길 가는 자의 노래

집을 떠나 길 위에 서면
이름없는 풀들은 바람에 지고
사랑을 원하는 자와
사랑을 잃을까 염려하는 자를
나는 보았네
잠들면서까지 살아갈 것을 걱정하는 자와
죽으면서도 어떤 것을 붙잡고 있는 자를
나는 보았네
길은 또다른 길로 이어지고
집을 떠나 그 길위에 서면
바람이 또 내게 가르쳐 주었네
인간으로 태어난 슬픔을
다시는 태어나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자와
이제 막 태어나는 자
삶의 의미를 묻는 자와
모든 의미를 놓아 버린 자를
나는 보았네

 

여행자를 위한 서시

날이 밝았으니 이제
여행을 떠나야 하리
시간은 과거의 상념 속으로 사라지고
영원의 틈새를 바라본 새처럼
그대 길 떠나야 하리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냥 저 세상 밖으로 걸어가리라
한때는 불꽃 같은 삶과 바람 같은 죽음을 원했으니
새벽의 문 열고
여행길 나서는 자는 행복하여라
아직 잠들지 않은 별 하나가
그대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고
그대는 잠이 덜 깬 나무들 밑을 지나
지금 막 눈을 뜬 어린 뱀처럼
홀로 미명 속을 헤쳐나가야 하리
이제 삶의 몽상을 끝낼 시간
순간 속에 자신을 유페시키던 일도 이제 그만
종이꽃처럼 부서지는 환영에
자신을 묶는 일도 이제는 그만
날이 밝았으니, 불면의 베개를
머리맡에서 빼내야 하리
오, 아침이여
거짓에 잠든 세상 등 뒤로 하고
깃발 펄럭이는 영원의 땅으로
홀로 길 떠나는 아침이여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
혹은 충분히 사랑하기 위해 길 떠나는 자는 행복하여라
그대의 영혼은 아직 투명하고
사랑함으로써 그것 때문에 상처입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리
그대가 살아온 삶은
그대가 살지 않은 삶이니
이제 자기의 문에 이르기 위해 그대는
수많은 열리지 않는 문들을 두드려야 하리
자기 자신과 만나기 위해 모든 이정표에게
길을 물어야 하리
길은 또다른 길을 가리키고
세상의 나무 밑이 그대의 여인숙이 되리라
별들이 구멍 뚫린 담요 속으로 그대를 들여다보리라
그대는 잠들고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꿈을 꾸리라

 

감자와 그밖의 것들에게

감자에게,
만일 내가 감자라면
그렇게 꽉 움켜쥔 주먹으로
자기 자신과 타인을 대하진 않으리라

어린 바닷게에게,
만일 내가 바닷게라면
그렇게 매순간 삶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자기 몸보다 더 큰 다리를 갖고 있진 않으리라

거미에게,
만일 내가 거미라면
그렇게 줄곧 허공에 매달려
초월을 꿈꾸진 않으리라

벌에게,
만일 내가 벌이라면
그렇게 참을성 없이 순간의 고통을 찌르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진 않으리라

언덕에게,
만일 내가 저편 언덕이라면
그렇게 보잘 것 없는 희망으로
인간의 다리를 지치게 하진 않으리라

그리고 밤에게,
만일 내가 밤이라면
그렇게 서둘러 베개를 빼 인간들을
한낮의 외로움 속으로 데려가진 않으리라

 

새들은 우리집에 와서 죽다

새는 공중을 나는 동안 대기를
거의 누르지도 않았다
그러나 오월의 하루 동안 새가
우리집 지붕 위를 맴돌다가
갑자기 집 뒤의 빈터로 추락했을 때
나는 지구가 한 쪽으로 기우뚱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새를 떠받치고 있던
어떤 손이 치워지기라도 한 듯
새가 수직으로 빈터의 민들레밭에 내리꽂히자
우리집 식탁이 기울고
식탁에 놓인 오후의 찻잔이 기울고
순간적으로 찻잔의 물이 엎질러졌다

죽음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고 말하려는 듯
추락한 새의 무게는
우리집 뒤의 민들레밭을 누루고
민들레밭은 다시 도시 전체를 누르고
도시는 또다시 도시들로 가득한 세상 전체를 눌렀다
그렇게 해서 잠시 세상의 무게 중심이
한 마리 새의 죽음의 무게로 이동하는 것을 나는 느꼈다

마치 세상의 모든 새들이 그날 오후
우리집 빈터에 와서 추락하기라도 한 듯
그리고 세상의 모든 날개들을 떠받치기라도 한 듯
어떤 손이 갑자기 치워지기라도 한 듯
지구의 중심이 우리집
민들레의 빈터로
기우뚱하고 이동하는 것을 나는 느꼈다

 

사랑과 슬픔의 만다라

너는 내 최초의 현주소
늙은 우편 배달부가 두들기는
첫번째 집
시작 노트의 첫장에
시의 첫문장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나의 시는 너를 위한 것
다른 사람들은 너를 너라고 부른다
그런나 나는 너를 너라고 부르지 않는다
너는 내 마음
너는 내 입 안에서 밤을 지샌 혀
너는 내 안의 수많은 나

정오의 슬픔 위에
새들이 찧어대는 입방아 위에
너의 손을 얹어다오
물고기처럼 달아나기만 하는 생 위에
고독한 내 눈썹 위에
너의 손을 얹어다오
 
나는 너에게로 가서 죽으리라
내가 그걸 원하니까
나는 늙음으로 생을 마치고 싶지는 않으니까
바닷새처럼 해변의 모래 구멍에서
고뇌의 생각들을 파먹고 싶지는 않으니까

아니다
그것이 아니다
내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내가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넌 알몸으로 내 앞에 서 있다

내게 말해다오
네가 알고 있는 비밀을
어린 바닷게들의 눈속임을
순간의 삶을 버린 빈 조개가 모래 속에
감추고 있는 비밀을
그러면 나는 너에게로 가서 죽으리라
나의 시는 너를 위한 것
다만 너를 위한 것

 

잔 없이 건네지는 술

세상의 어떤 술에도 나는 더 이상 취하지 않는다

당신이 부어 준 그 술에
나는 이미
취해 있기에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살고 싶다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사랑하고 싶다
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세상을 살기 위해
평생을 두 마리가 함께 붙어 다녔다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사랑하고 싶다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을 뿐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혼자 있으면
그 혼자 있음이 금방 들켜 버리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싶다

 


* 비목: 당나라 시인 노조린의 시에 나오는 물고기

 

신비의 꽃을 나는 꺽었다

세상의 정원으로 나는 걸어들어갔다
정원 한가운데 둥근
화원이 있고 그 중심에는
꽃 하나가 피어 있었다

그 꽃은 마치 빛과 같아서
한번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부셨다
나는 둘레에 핀 꽃들을 지나
중심에 있는
그 꽃을 향해 나아갔다

한낮이었다. 그 길이 무척  멀게 느껴졌다
나는 서둘러야만 했다
누구의 화원인지도 모르지만
그 순간 그것은
나를 향해 저의 세계를
열어 보이는 듯했다
 
밝음의 한가운데로 나는 걸어갔다
그리고 빛에 눈부셔 하며
신비의 꽃을 꺾었다
그 순간 나는 보았다 갑자기
화원 전체가 빛을 잃고
페허로 변하는 것을

둘레의 꽃들은 생기를 잃은 채 쓰러지고
내 손에 들려진 신비의 꽃은
아주 평범한
시든 꽃에 지나지 않았다

 

작은 대나무 다리 위에서

누가 만들었는지 알 길 없는
인적 드문 오솔길에 놓인
작은 대나무다리

군데군데 구멍이 나고
이제는 한 사람의 무게마저 지탱하기 힘든
내가 자주 가는 산책길
작은 대나무다리

내가 가졌던 모든 것과
가지려고 했던 모든 것 사이에
만났던 모든 사람들과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모든 사람들 사이에
언제나 말없이 놓여 있는
작은 대나무다리

눈바람에 시달리고
이제는 너무 오래되어
자신의 무게마저 견디기 힘든
하지만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않은
나의 작은 대나무다리

그 위에 서서 내려다보면
아래는 아득한 절벽

 

지상에서 잠시 류시화라고 불리웠던

무릎까지 바지를 걷어올리고
별들이 가득 내린 강을 건너다가
그만 별에 발을 찔렸습니다
지금은 집에 돌아와
그 옛날 내가 떠나온 별에게
긴 편지를 씁니다 어떤 영혼은
별에서 왔다는
별에서 와서 고독하다는
그 말을 내 집 지붕과 얹어둡니다
이 짧은 지상의 삶과는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나는 잊지 않았습니다
내가 띄운 편지가 그 별에 가 닿았는지
내 집 지붕위에서 별 하나가 흔들립니다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세상을 잊기 위해 나는
산으로 가는데
물은 산 아래
세상으로 내려간다
버릴 것이 있다는 듯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는 듯
나만 홀로 산으로 가는데
 
채울 것이 있다는 듯
채워야 할 빈 자리가 있다는 듯
물은 자꾸만
산 아래 세상으로  흘러간다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눈을 감고
내 안에 앉아
빈 자리에 그 반짝이는 물 출렁이는 걸
바라봐야 할 시간

 

굴뚝 속에는 더 이상 굴뚝새가 살지 않는다

입을 벌리고 잠을 자는 것은
인간뿐
삶이 그만큼 피곤하기 때문이다
굴뚝 속에는 더 이상
굴뚝새가 살지 않는다
보라, 삶을
굴뚝새가 사라진 삶을
모든 것이 사라진 다음에
오직 인간만이 남으리라
대지 위에
입을 벌리고 잠든 인간만이

 

강으로 죽으로 오는 사람들을 나는 보았다

강으로 죽으로 오는 사람들을
나는 보았다
인도 갠지스 강의 화장터에서
사람과 함께 꽃이 타는 것을
나는 보았다
꽃도 타고
사람 가슴 속의 불꽃도 함께 타는 것을
 
강물에 흘러가는 꽃등불을
나는 보았다
만년설이 녹아 생긴 그 강물에
내가 띄운 꽃등불도 함께 떠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어떤 생각이 나로 하여금
물에 비친 내 얼굴을 출렁이게 했을까

내 꽃등불은 지금
저 혼자 깜박이며 어느 곳을 떠가고 있을까
물새떼처럼
강으로 죽으로 오는 사람들을
나는 보았다
그때 어떤 인도인 마술사가 내게 다가와
타고 남은 재 한 줌을 집어들어
순식간에 나비로 바꿔 버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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