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김유림 기자 / 사진·김형우 기자
입력 2006.08.24 16:01:00
‘자옥아’에 이어 최근 ‘무조건’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트로트 가수 박상철. 하지만 그가 거둔 지금의 성공 뒤에는 눈물로 얼룩진 과거가 있었다. 강원도 삼척에서 가수의 꿈을 안고 무작정 상경해 노숙자 생활하기도 했던 의지의 사나이, 박상철을 만났다.
“무작정 상경해 노숙생활, 음반 홍보하며 험한 일 많이 겪었지만 꿈이 있었기에 힘든 줄 몰랐어요”
지난 5·31 지방선거 때 유세장에서 응원가로 가장 많이 사용된 음악이 바로 트로트 가수 박상철의 ‘무조건’이다. 최근 MBC ‘가요베스트’ 1위, 전국민방 ‘전국 톱 10 가요쇼’ 11주 연속 1위, 아이넷 TV ‘성인가요 차트 50’ 6주 연속 1위를 차지한 박상철은 바쁜 스케줄 때문에 목이 쉴 정도이지만, 그토록 원하던 가수의 꿈을 이룬 지금 정말 행복하다고 한다.
그는 지난해 겨울 오랫동안 떨어져 살던 가족들과 살림을 합쳤다. 아내 김점숙씨가 올해 중학교 1학년인 큰딸, 초등학교 5학년인 둘째 아들, 유치원에 다니는 막내딸과 함께 강원도 삼척에서 운영하던 미용실을 처분하고 서울로 올라온 것. 서울 여의도에 있는 그의 집에 들어서자 막내딸 효리가 기자를 반갑게 맞아줬다. 효리라는 이름은 가수 이효리처럼 예쁘게 자라라는 의미에서 ‘자옥아’를 만든 작곡가가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새벽에 들어와 아침 늦게 활동을 시작하는 그는 아이들과 놀아줄 시간이 많지 않지만 하루에 한번씩 아이들과 뽀뽀하는 걸 빼먹지 않는다고. 또한 시간이 날 때면 아이들 머리를 직접 깎아줄 정도로 자상한 아빠라고 한다.
“얼마 전 가족들과 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이제껏 제가 총각이라고 생각한 젊은 팬들이 실망했는지 팬클럽 ‘박사모(박상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더니 5만 명이던 회원수가 갑자기 줄어들었더라고요. 저보다도 아이들이 아빠 인기 떨어진다고 걱정을 많이 해요(웃음).”
“노숙자 생활하며 번 돈 사기당하고 삶을 포기하려 한 적도 있어요”
강원도 삼척에서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노래실력이 뛰어나 동네 노래자랑을 비롯해 각종 대회에 나가 상을 휩쓸며 가수의 꿈을 키웠다. 결국 가수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80년대 말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는데, 기차표를 살 돈조차 없어 무임승차를 했다고 한다. 서울역에 도착한 그의 두 손에는 가수 모집공고가 실려있는 잡지 한 권과 옷 보따리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고. 그는 무작정 작곡가 사무실로 찾아가 가수가 되고 싶다며 작곡가 앞에서 홍수철의 ‘철없는 사랑’을 불렀다고 한다. 그의 노래를 들은 작곡가는 “당장 음반을 내도 될 실력”이라고 말하면서도 가수가 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돈만 있으면 가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날부터 인력시장을 전전했고 거처를 마련하지 못해 노숙생활을 해야 했다.
가수가 평생 꿈이었던 박상철은 결혼 전 ‘가수가 되겠다는 남편의 뜻을 막지 않는다’는 내용의 각서를 아내로부터 받아뒀다고 한다.
“그때는 꿈이 있어 노숙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한 뒤 아파트 계단이나 지하철 통로에 쭈그리고 앉아 잠을 청했는데, 노숙자들끼리 영역다툼이 벌어져 봉변을 당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에요. 술 취한 노숙자한테 소주병으로 뒤통수를 얻어맞아 머리가 찢어진 적도 있고요.”
끼니를 거르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은 그는 8개월 뒤 작곡가를 찾아갔고 작곡가는 한 달 내에 음반을 취입하자는 약속을 했지만 약속한 날짜가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사기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동안 고향에 계신 부모에게 연락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그는 자존심 때문에 도저히 고향에 내려갈 수 없었다고 한다. 꿈마저 잃어버린 채 진짜 노숙자로 전락한 그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한 나머지 여러 번 인생을 포기하려 했다고. 그러던 어느 날 명동 거리를 지나다 무수한 미용실 간판을 보고 불현듯 미용사가 되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가수가 되기 위해서라도 돈을 버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한 그는 그날 바로 남아있던 돈을 탈탈 털어 미용학원에 등록했고 덕분에 숙식도 학원에서 해결하면서 비로소 노숙생활을 끝낼 수 있었다고.
“다시 태어난 기분으로 미용기술을 배웠어요. 그때만 해도 남자 미용사가 많지 않을 때라 미용을 배운다는 게 조금 쑥스럽기도 했지만 막상 시작하고 보니 적성에 잘 맞더라고요. 밤늦게까지 혼자 남아서 가발로 커트, 파마 연습을 하면서 정말 열심히 살았죠. 운 좋게 시험도 한 번에 붙었고 헤어디자이너 보조로 일을 시작했어요.”
몇 년 사이 보조에서 정식 헤어 디자이너로 승격한 그는 미용사로 이름을 알릴 즈음 군대에 갔다. 제대 후에도 미용 일을 계속한 그는 어느 날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화 한 통을 받고 급히 고향에 내려갔는데, 어머니의 병세가 악화되자 서울로 돌아가려던 애초의 계획을 접고 고향에 정착하고 말았다.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내고 집 근처 미용실에 일자리를 구한 그는 그곳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고 한다. 두 사람은 당시 스물다섯, 스물 셋으로 다소 어린 나이였지만 빨리 안정을 찾고 싶은 마음에 결혼을 서둘렀다고. 91년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은 삼척시내에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미용실을 발견하고 헐값에 인수해 ‘박상철 헤어아트’ 간판을 내건 미용실을 개업했다. 두 사람은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며 차곡차곡 기반을 다져갔고 미용실은 개업하고 얼마 안돼 삼척 시내에서 ‘노래 불러주는 남자 미용사가 있는 미용실’로 유명해졌다고 한다. 결국 동네에서 ‘가수 미용사’로 통한 그는 미용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그 동안 마음 깊은 곳에 누르고 있던 가수의 꿈을 다시 펼치기로 마음먹었다. “아내의 반대가 없었냐”고 묻자 그는 “이미 결혼하기 전 ‘가수가 되겠다는 남편의 꿈을 절대 막지 않는다’는 내용의 서약서를 써뒀다”며 웃었다.
“처음에는 서울 가기 전에 이혼도장부터 먼저 찍으라며 반대를 많이 했어요. 하지만 결혼 전 남편과 한 약속도 있고, 평생소원이라는데 더 이상 반대할 수가 없더라고요. 결국 남편 뜻대로 서울로 보내줬죠.”
그는 2000년 새해 동해 앞바다에서 가족들과 함께 파이팅을 외친 뒤 비장한 각오를 품고 서울로 올라왔다.
“처음에는 ‘부메랑’이란 곡을 받아 활동을 시작했는데 역시 가수가 되는 길이 쉽지 않더라고요. 음반이 나와도 노래를 틀어주는 곳이 없으니 가수가 됐다고 할 수가 없었죠. 결국 불도저 정신으로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어요. 하루도 빠짐없이 라디오 방송국을 찾아가 성인가요 프로그램 담당 PD에게 CD를 건네고 인사를 했어요. 매일 아침 찾아가니까 어느 날은 더 이상 찾아오지 말라는 말까지 하더라고요. 하지만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는 생각에 계속 방송국으로 출근을 했어요. 결국 참다못한 한 PD가 소리를 버럭 질렀는데 그 덕분에 높은 분 눈에 띄어 진솔한 대화를 나눌 기회를 얻었죠. 그렇게 조금씩 제 노래를 알리기 시작했고 방송가에서 ‘박상철’ 하면 ‘찐드기’라 불릴 정도로 열심히 홍보하고 다녔어요.”
대부분의 연예인이 그렇듯 그 또한 무명시절의 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택시·버스 기사들에게 CD를 무료로 나눠주고, 대형 쇼핑센터 DJ를 몇 번이고 찾아가 노래를 틀어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어느 날엔가는 CD가 시멘트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광경을 보고 순간 주먹이 불끈 쥐어졌지만 ‘노숙자 시절도 겪었는데, 이 정도쯤은 별거 아니다’ 하고 마음을 가다듬었다고 한다.
“제가 고생하는 것은 둘째치고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어요. 특히 혼자서 미용실을 꾸려가고 있는 아내에게 정말 미안했죠. 처음 올라올 때 예상한 비용이 있었는데, 막상 올라와서 생활하다보니 그보다 훨씬 많은 돈이 들어가더라고요. 서울 뿐 아니라 지방 방송까지 홍보하러 다녀야 했는데 여관에서 자는 돈이 아까워 차에서 잔 적도 많아요.”
“혼자 미용실 운영하며 뒷바라지해준 아내에게 미안하고 고마워요”
홍보 CD 한 장 들고 전국을 누빈 그는 어느 날 문득 TV를 보다가 얼굴을 먼저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라디오 방송에서 간간이 자신의 노래가 흘러나왔지만 길거리를 다니면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것. 결국 노래와 얼굴을 함께 알리기로 결심한 그는 연기학원을 다니면서 MBC ‘서프라이즈’ ‘타임머신’, KBS ‘이것이 인생이다’ 등에 출연하며 재연배우로 활동했다.
“지금 생각해도 연기는 정말 못했던 것 같아요(웃음).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서도 ‘제가 요즘 연기도 시작했는데 TV에서 보면 연기 가장 못하는 사람이 바로 접니다’ 하고 홍보를 했을 정도예요. 하지만 재연배우를 한 덕분에 생각보다 쉽게 얼굴을 알릴 수 있었던 건 사실이에요. 장윤정씨도 저와 함께 재연배우로 활동을 많이 했는데, 주로 연인 사이로 나와서인지 당시 고향에서는 제가 장윤정씨와 바람났다는 소문이 파다했어요(웃음).”
오직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오랜 시간 먼 길을 돌아온 그는 여전히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말한다. 가수로서 더욱 노력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동안 소홀했던 가족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쏟을 계획이라고. 아직까지 경제적으로 넉넉한 편은 못되지만 온 가족이 한데 모여살 수 있는 집이 있고, 가족 모두가 건강한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그는 “올 연말 가요대상에서 상을 받는 게 목표”라며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여성동아 2006년 8월 51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