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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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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장혜정 여성조선 기자 [여성조선]


신현순 여사는 지팡이를 내던지고 아들 반기문을 끌어안았다.
조선일보 DB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 母情♡


아흔의 노모가 지팡이를 내던지고 달려간 곳은 장남의 품속이었다.
매일같이 108배를 올려가며
그저 건강하기를 빌고 또 빌었던 아들이었다.
“생살을 깎아 먹여도 아깝지 않다”던 노모의 아들은
얼마 전 연임소식을 전해온 반기문 유엔(UN) 사무총장이다.
1년 만에 다시 아들의 얼굴을 매만졌다는 노모는
벌써부터 아들이 그립다.

“나는 친정 할머니가 가르쳐주신 대로 우리 애들을 키웠는데,
‘물에 돌팔매질 하지 말거라.’, ‘나뭇잎 함부로 따지 말거라.’,
‘땅에 떨어진 물건이라도 함부로 주워오지 말거라.’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어.
기특하게도 우리 애들은
누구 하나 속 한 번 안 썩이고 가르친 대로 착실하게 커줬어.”

반기문 UN 사무총장의 어머니 신현순 여사(90)를 만난 건
충북 충주시의 한 아파트 노인정에서였다.
연분홍 장미가 그려진 곱디고운 치마에
하얀 리넨 재킷을 차려입은 신 여사는
아흔이라는 나이가 무색하도록 정정한 모습이었다.
약속도 없이 찾아간 기자 일행이 당황스러울 법도 했지만,
“어떻게 그 멀리서 나를 보러 왔느냐”며
손을 꼭 잡아주기도, 등을 쓸어내려주기도 했다.

노인정 한쪽에서 화투삼매경에 빠져 있던 할머니들이
“아들이 유명해서 사진도 찍히고 좋겠다”는 농담을 건네자
신 여사는
“여기저기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데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 줄 모른다”며 웃었다.
며칠 전 있었던
반기문 사무총장의 고향 방문행사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반 총장은 지난 14일
고향인 충북 음성군 원남면 상당1리 윗행치마을을 방문했다.
유엔 사무총장이 된 후 네 번째 방문이었다.
선친 묘에서 성묘를 한 뒤
광주 반씨 조상의 사당에서 참배를 마친 반 총장 내외는
지난해 말 복원된 생가를 둘러보기도 했다.

수많은 환영 인파에게
“여러분의 따뜻한 성원에 힘입어
열심히 세계 평화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뜻을 전한 반 총장은
모교 충주고등학교를 찾아 후배들을 만나기도 했다.
6일간의 한국 방문일정을 마친 반 총장은
이날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딸 반정란씨 내외와 함께 살고 있는 노모는
집으로 가자며 기자의 손을 이끌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아파트 앞 슈퍼에서 사들고 간 두유박스를
한사코 노인정에 두고 가라며 손사래를 치던 모습이었다.
“여기 할머님들 잡숫게 그냥 두라”는 말씀 속에는
분명 따뜻한 배려가 배어 있었다.

공동 출입문을 열고 도어락의 숫자를 누르는 등 아흔의 노인에게
결코 간단하지만은 않을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어느 깔끔하고 소박한 가정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사진기자가 안쓰러웠던지
노모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선풍기 바람을 쐬라고 성화였다.
반기문 총장의 어머니 신현순 여사 / 조선일보 DB
이리저리 돌아가는 선풍기 고개를 바라보며
그렇게 인터뷰가 시작됐다.
기자는 노환으로 청각이 불편한 신현순 여사의 곁에 바짝 다가앉아 귀에다 대고 큰 소리로 또박또박 질문을 해야 했다.

불과 3일 전 아들을 부둥켜안은 노모는
“그날이 꼭 꿈결 같았다”고 회상했다.
연임 이후 처음으로 고향 방문에 나선 아들을 만나기 위해
노모는 미리부터 행사장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학수고대 하던 아들이 들어서자
노모는 지팡이를 내던지고 얼른 아들을 얼싸안았다.
“1년 만에 만났는데 너무 좋았지 뭐.
바빠서 제대로 얘기도 못 했어.
그저 건강해라.
끼니 잘 챙겨먹어라. 그러고 말았지.”

아들 얘기에 진작부터 화색이 돌던 신현순 여사는
반 총장의 어린 시절을 들려달라는 말에
마치 어제 일인 양 생생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기문이 위로 형이랑 누나가 있었어.
토실토실하니 잘 크던 애들이
꼭 두 살을 못 넘기고 고만 가버리더라고.
세 번째 들어선 애가 기문인데
앞에 애들이 잘못돼서 집안 어른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태기가 있자마자
친정 할머니가 무당을 불러다가 굿까지 했을 정도니까….
나도 절에 다니면서 빌고 또 빌었어.
점점 배가 불러오는데 얼마나 조심을 했다고.
기문이를 낳은 건 초여름이었어.
그날 우리 숙모가 도토리묵을 쑨다고하기에,
그래서 같이 도토리 물을 내는데 아무래도 애가 나올 것 같더라고.
집에 가서 낳아야겠다는 생각에 대문간을 막 나서는데
문지방을 넘기까지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몰라.
간신히 문지방을 넘어서 앞치마 끄르고,
치마 끄르고 애를 낳았지.
그런데 애 목에 탯줄이 세 번이나 감겨 있었어.
새파랗게 질려서 울지도 않더라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
그래 앞치마를 덮어서 가만, 가만 애기 몸을 주무르니까
그때서야 켁켁거리면서 울기 시작하는 거야.
애가 소담하니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천신만고 끝에 얻은 아들.
어머니는 불면 날아갈까 쥐면 터질까, 애지중지 아들을 길렀다.
부유한 가정에서 가족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란
어린 시절의 기문은 예의를 알고, 도리를 아는 착한 아이였다.
<wbr />“우리 기문이는 참 착했어. 너무 착해서 가끔 미울 정도였지.
마을에 동갑내기 애가 하나 있었는데,
걔한테 만날 그냥 두들겨 맞고 오는 거야.
그러면 기문이 동생이 대번에 나한테 쫓아와서
‘엄마, 형아 또 맞아. 형아 죽어.’ 그랬지.
속은 상해도 ‘너도 같이 때려라.’ 그러진 않았어.
나는 친정 할머니가 가르쳐주신 대로 우리 애들을 키웠는데,
‘물에 돌팔매질 하지 말거라.’, ‘나뭇잎 함부로 따지 말거라.’,
‘땅에 떨어진 물건이라도 함부로 주워오지 말거라.’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어.
‘나중에 저승 가면 그대로 되돌려 받느니라.’ 그랬지.
기특하게도 우리 애들은
누구 하나 속 한 번 안 썩이고 가르친 대로 착실하게 커줬어.”

3남2녀의 형제들 중에서도 유독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했던
장남 반기문은 어머니의 자랑이었다.
동네 어른들에게 90도로 허리 굽혀 인사하는 아이,
밥 한 술에 신문 한 줄을 읽던 아이,
다투는 동생들에게 찬찬히 그 이유를 묻고 이야기를 들어주던 아이,
그 아이가 바로 반기문이었다.

통운회사 소장을 지냈던 아버지가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급격하게 가세가 기울었던 그 시절에도
기문은 동생들을 보살피며 집안일을 도왔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을 만큼 지독하게 공부했는데,
어머니는 아직도 밤을 새워가며 책을 읽고 공부를 하던
아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좀 자거라, 자거라.’ 하는 말이 입에 붙어버렸어.
어쩌다 밥이 눌어 누룽지가 생기면
그거 박박 긁어서 공부하는 데 밤참으로 넣어주고 그랬지.
외교관이 꿈이라 영어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저기 댐 가는 길목에 비료공장이 하나 있었단 말이야.
거기에 있는 외국인 근로자를 만난다고
친구 서이서(셋이서) 만날 쫓아다녔어. 그 친구 이름이 뭐냐면….”

아흔이 넘은 노모는
50년 전 아들의 친구 이름까지 줄줄 꿰고 있었다.
아들에 대한 지극한 애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반 총장이 서울대 입학시험을 앞두고 있던 그때
나무 밑에다 백설기를 쪄놓고
수십 번, 수백 번 절을 올리던 어머니는
실로 놀라운 일을 경험하기도 했다.<wbr /><wbr />“우리 기문이가 서울대 입학시험을 치르고 와서 나한테 그래.
어젯밤에 꿈을 꿨는데,
벽에 웬 문제가 빽빽하게 적혀 있어서 다 풀어봤더니
다음 날 시험에 꿈에서 본 문제가 똑같이 나오더라고.
예삿일이 아니구나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서울대 외교학과에 수석으로 척 붙었지 뭐야.”

노모는 요즘도 매일같이 집 근처 절에 출근도장을 찍는다.
불상 앞에 앉아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치성을 드리는데,
그 정성의 중심엔 언제나 아들 반기문이 있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은 없어도,
유독 아픈 손가락은 있게 마련이다.
“뭐니 뭐니 해도 장남이 최고”라는 노모의 얼굴에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애정이 서렸다.
노모의 지극정성은 반 총장을 지탱하는 힘이었다.

반기문 총장은 어머니 신현순 여사를 많이 닮았다.
노인정에서 한눈에 반 총장의 어머니를 알아볼 수 있었던 건
그래서였다.
“반 총장님이 어머님을 많이 닮았다”는 말에
노모는 “나보다 저희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기문이는 아버지랑 판박이여. 점잖은 성격이며,
남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아주 똑같아.
애 아버지 살아생전 내 소원이 뭐였게.
부부싸움 한번 해보는 게 소원이었어.
마음 단단히 먹고 한바탕 하려고 들면
고만 자리를 피해버리는데 싸움이 날 수가 있나.
한약방을 했던 시아버지도 아픈 사람들을 도와주곤 하셨어.
그러고 보면 사람 선한 게 집안 내력인 것 같아.
참 우리 남편 사진을 좀 보여줄꺼나.”
신현순 여사는 한 장 한 장 사진을 짚어가며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 조선일보 DB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난 노모는
방으로 들어가 장롱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쇼핑백에서 꺼낸 세 개의 액자 속에는
반기문 총장의 부친 고 반명환 선생과 신현순 여사의 사진이
담겨 있었다.
“한 30년 전에 서울 구경 가서 찍은 사진인데,
양복 차려입은 품새가 근사하지?
참 멋쟁이셨어.
청주 농고까지 나온 똑똑한 양반이었는데….
너무 일찍 가버렸지….”

시와 붓글씨에 능했다는 반명환 선생은
1991년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했다.
당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협상에 매진하던 반 총장은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공동선언이 채택된 후에야 아버지 빈소가 있는 충주로 직행했다.

유치장에 갇혀 있는 교통사고 가해자를 돌려보낸 일도
반 총장의 인품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크고 작은 일화 중 하나다.
창고에 숨어든 도둑에게
“도둑이 되고 싶어 도둑이 됐겠나. 배가 고프니 그랬겠지” 하던
반명환 선생이나
“사고를 내고 싶어서 냈겠나. 피할 수 없어 그랬겠지” 하던
반기문 총장이나,
부자는 따뜻한 인품까지 꼭 닮아 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반 총장의 효심 또한 아버지를 닮은 것이라고 했다.
“애들 아버지가 부모님한테 그렇게 잘하더니,
우리 아들도 똑같이 배웠어.
한 달에 서너 번은 꼭 전화해서
‘어머니 건강조심하세요. 잡숫고 싶은 거 꼭 드세요.’
신신당부를 한다고. 용돈도 풍족하게 주는데, 선물도 참 잘해줘.
특히 좋은 약 같은 걸 얼마나 많이 사다준다고.
내가 이렇게 건강한 건 다 새끼들 덕분이여.
나랑 같이 사는 우리딸은 오빠 한국 오기 전에 나 잘못되면
다 지 책임이라면서 고기며, 과일이며, 날마다 잘해줘.
내가 참 복이 많아.”
며느리 유순택 여사와 다정하게 손을 잡고있는 노모.
조선일보 DB

인터뷰 내내 신현순 여사가 가장 많이 쓴 단어는 “착하다”였다.
그리고 착하디착한 아들보다 더 착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큰 며느리 유순택 여사라고 했다.

반 총장은 고등학교 3학년 때
‘VISTA(Visit International Student to America) 프로그램’에
충청도 대표로 자동 선발되어
1등으로 시험을 마치고 다른 학생 세 명과 함께 미국에 다녀왔다.
백악관에서 케네디 대통령을 직접 만난 반기문은
그 일을 계기로 외교관의 꿈을 더욱 확고하게 키웠다고 한다.

당시 한국 대표로 선정된 반기문에게
이웃의 충주여고 학생들이 복주머니를 만들어 건넸는데,
외국에서 만난 친구들에게 기념선물로 나눠주라는 의미였다.
이때 완성된 복주머니를 대표로 전달한 사람이
당시 충주여고 학생회장이었던 유순택 여사였다.

“우리 며느리가 고등학교 때부터 집에 놀러오고 그랬어도
기문이 색싯감인 줄은 몰랐어.
다른 데서 자꾸 중신이 들어오는데
기문이가 싫다니까 분명 색시가 있구나 했었지.
나중에 기문이 친구한테 둘이 서로 좋아지내는 사이라는 걸 듣고서
내가 10월 동짓달에 바로 결혼시켜 버렸어.
겪어보니, 우리 아들도 착하지만 며느리는 더 착해.”

결혼 직전 유순택 여사의 어머니는
“남자가 해 지기 전에 집에 오는 것은
직업이 없거나 큰 병을 앓고 있을 때이니
반 서방이 늦게 들어오는 것에 대해 뭐라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아내의 내조 덕분에
반 총장은 업무에 매진할 수 있었고 승승장구했다.

반 총장은 유 여사와 슬하에 1남2녀를 두고 있다.
현재 아시아재단 사업부장으로 근무 중인 맏딸 선용 씨(41),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미국 UCLA 경영대학원 과정을 마친 뒤
현재 뉴욕 금융회사의 중동지점에서
근무하고 있는 아들 우현 씨(37),
유엔아동기금(UNICEF) 케냐사무소에서
국제기구초급전문가로 일하고 있는 막내 딸 현희 씨(36)다.
신 여사는
“아이들 모두 제 아비, 어미를 닮아 착하고 바르게 컸다”며
“늘 보고 싶다”고 전했다.
지난 14일 충북 음성에서 있었던
반기문 un 사무총장의 고향방문 행사 / 조선일보 DB
인터뷰 말미,
문득 ‘반기문 총장의 태생에 어떤 특별함이 숨어 있진 않을까?’
하는 호기심이 들었다.
“꿈에 내가 어디를 막 가는데 길이 두 갈래로 나뉘더라고.
어느 한 길로 들어서니까
갑자기 하얀 도포를 입은 할아버지가 나타나서
다른 쪽 길로 가라지 않겠어?
그래 그 할아버지가 일러준 길로 걸어들어 갔는데
길마다 소나무가 다북다북하니 참 좋아.
한참을 가다 보니 조그만 오두막에서 우리 숙모가 나오데.
나한테 찹쌀떡 세 개를 주더라고.
그래서 내가 아들만 셋인가 봐.(웃음)
찹쌀떡을 받아들고 다시 걸어갔더니
이번엔 호두나무에 호두가 주렁주렁 열려 있어.
참 그 호두 좋구나 하면서 나무 가까이 가보니까,
그 아래 장끼 새끼가 푸드덕푸드덕 날아다니고 있는 거야.
그 꿈을 꾸고 나서 대번에 태기가 있더라고.”

두 시간의 인터뷰 끝에
“착한 끝은 있다”는 말과 “자식은 부모의 덕으로 커간다”는 말이
떠올랐다.
겸손함과 성실함, 상대를 먼저 살피는 배려는
반 총장이 부모님에게 받은 최고의 유산이었다.
‘생살을 깎아 먹여도 아깝지 않은 부모의 마음’을,
이날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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