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자료

그 쇳물 쓰지마라

모바일 App 사용자에게는 실시간 전송!

"내가 아니라 산업 현장 안전에 더 관심을"

[최초인터뷰]'용광로 청년' 추모시 쓴 허모씨

2010년 09월 10일 (금) 23:52:21

임수정 기자 ( imaudry@mediatoday.co.kr)

“저에게 관심을 보일 일이 아닙니다. 언론이 관심을 갖고 취재를 해야 한다면 바로 사고가 일어난 사업장이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는 완강했다. 자신의 심경을 담은 A4 두 장 분량의 메일을 보내왔지만, 그 내용이 공개되거나 기사화되는 것은 사양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지난 7일 연합뉴스는 당진의 한 중소 제철소에서 작업 중 용광로에 빠져 숨진 김 모씨의 사망 사고 기사를 전했다. 그 기사는 그 자체로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못했다. 한국 사회는 이미 그런 죽음은 그냥 지나칠 정도로 둔감해져 있었다. 너무 충격적인 죽음이 많아서일까? 어쨌든 29살 젊은 청년의 죽음을 알리는 소식포털 사이트 사회면 한 귀퉁이를 채워주는, 곧 사라질 기사였다. 그는 그런 기사를, 죽음을 세상에 알리는 전령사의 역할을 했다.

 

아이디(alfalfdlfkl)로만 알려진 그는 그 기사 댓글에 16줄 짧은 조시를 남겼다.

 

 

그 쇳물 쓰지 마라

광온(狂溫)에 청년이 사그라졌다.

그 쇳물은 쓰지 마라.

자동차를 만들지도 말것이며
철근도 만들지 말것이며
가로등도 만들지 말것이며
못을 만들지도 말것이며
바늘도 만들지 마라.

 

모두 한이고 눈물인데 어떻게 쓰나?
그 쇳물 쓰지 말고
맘씨 좋은 조각가 불러
살았을적 얼굴 흙으로 빚고

쇳물 부어 빗물에 식거든
정성으로 다듬어
정문 앞에 세워 주게.

 

가끔 엄마 찾아와
내새끼 얼굴 한번 만져 보자. 하게.

 

16줄의 짧은 조시는 이웃의 죽음에 무뎌 딘 사람들의 가슴을 두드렸다. 혹시라도 자신이 다칠까봐, 상처받을까 싶어 꼭 꼭 잠겨 있던 감성의 빗장을 풀게 했다. 그의 조시는, 그리하여 김씨의 죽음은 트위터을 타고 삽시간에 인터넷 세상을 물들였다.

 

 

 

▲ ⓒMBC

 

 


사람들은 일어났다. 다시는 이런 죽음이 없어야 된다고 목소리를 모았다. 누리꾼들은 그 쇳물로 이 청년의 추모동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나섰다. 80년대 민중미술 활동으로 유명했던 조각가 김봉준씨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동상건립을 함께 추진할 것을 제안했다. 다음 아고라에선 추모동상을 만들자는 서명이 한창이다.

 

그런 그가 누구인지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보통의 방법으로는 그를 알아낼 수도, 찾을 수도, 접촉할 수도 없었다.  당연히 공개된 인터넷 공간에선 메일 주소도 알 수 없었다. 시사만평 등에 단 댓글 등에서 그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정도의 추정만 가능했다.

 

 

 

▲ 미디어오늘 9월10일자 만평 ⓒ이용호 화백

 

 


어느새 ‘성지’가 된 그의 댓글에 기자가 “어떤 분인지 이야기 나누고 싶다”고 글을 남긴지 2시간 만에 온 그의 메일은 조심스러웠으나 매우 뜨거웠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글이 공개되거나 기사화되는 것은 한사코 사양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언론이 자신에게 쏟는 관심도 정중히 사양했다. 하지만 기자의 설득 끝에 마음을 열었다.

 

사업체 쪽과 누리꾼들의 감정싸움 양상으로 치닫는 현실이 몹시 안타깝다고 밝힌 그는 조목조목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언론이 자세한 현장취재를 하지 않고 있다 보니 누리꾼들의 추측이 계속되고 그 때문에 발생하는 감정싸움이 안타깝다는 얘기였다.

 

안양에 거주하며 애니메이션영화 관련 업종에 종사하고 있는 허모씨라고 자신을 밝힌 그는 자신이 맨 처음 사건을 접하고 느낀 감정은 “대체 어쩌다가?” “왜?”였다고 했다. 그는 “억울한 죽음을 당한 청년을 영웅으로 만들거나 자신의 글이 화제가 되는 것보다 사고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취재가 더 필요하다”고 누차 강조했다.

이어 그는 지난 7월과 8월에 3명의 현장 노동자가 부산의 고층건물 건설 현장에서 추락사 했던 사고를 기억하냐고 기자에게 물었다. 그는 “정부가 노동현장에서 계속 이어지는 사고를 방지할 수 있는 강력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며 “용광로 위를 오가든, 컴퓨터 위에서 프로그램을 짜든 누구나 건강하게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또 자신이 과거에 생산직으로 일했던 경험과 함께 ‘안전’과 ‘일의 능률’이 반비례하다고 생각하는 현장의 풍토가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말로만 안전교육이 아닌 실제로도 안전을 제일로 생각하는 현장의 분위기가 중요하다는 말이었다.

 

그의 지적대로 현장의 문제를 취재하는 언론은 거의 없었다. 모두 화제가 된 추모시에만 감성적으로 올인했다. 민중의 소리 등 일부 언론이 유골 수습 현장 등에 대한 취재에 나섰지만, 회사 측의 취재 거부로 어려움을 겪었다.

 

민중의 소리는 10일 장례식장에서 만난 회사 관계자가 기자의 취재 요청에 “이제 그만하라. 언론에 나올 만큼 나왔고 더 나와야 좋을 것이 없다”며 불쾌한 감정을 드러냈다고 전했다. 뒤늦게 언론들이 관심을 갖고, 또 모든 책임이 회사 쪽으로 전가되고 있는 듯 한 상황을 무척 부담스러워 하는 것으로 보인다.

 

조시를 쓴 그의 지적처럼 결코 이 제철소 한 곳만은 문제는 결코 아닐 것이다. 세계일보 8월 19일자 산업재해 통계에 관한 보도는 그 실태를 잘 말해준다. 올해 상반기 산업재해자 수는 4만8066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3%(2861명) 증가했다. 이 추세대로라면 올해 산재자 숫자가 10만 명을 돌파한다. 18년 만에 산업재해자 수가 다시 10만 명을 넘어서게 되는 것이다. 시대의 역행과 민주주의의 퇴행이 곧 노동자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산재사망 10만인률(근로자 10만 명당 산재 사망자)은 20.99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1개 회원국 중 1위다. 2위인 멕시코보다 2배 이상 높은 수치다.

 

조시를 쓴 허모씨는 기자에게 보낸 메일 글 마지막에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누구나 고된 노동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는 자식들에게 좋은 공부 시키고, 가족들과 맛있는 음식 먹고, 경치 좋은 곳에 여행도 가고, 예쁜 옷도 사 입고 영화도 보는, 비록 평범하지만 눈부신 일상의 행복 때문이다.”

 

무슨 일을 하든 똑같이 안전한 세상, 약자들이 목숨 걸고 일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그리고 ‘눈부신 일상의 행복’을 맛볼 수 있는 세상, 그런 세상은 정녕 요원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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