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비가 전해주는 영락대왕의 빛나는 업적은 이뿐만이 아니다. 고구려가 백제와의 싸움에서 이기며 영토를 넓혀 간 사실은 이미 [삼국사기]에도 여러 차례 나왔다. 비문에서도 이 같은 사실은 여러 군데에서 보이는데, 이 밖에도 백제와 왜가 연합하여 신라를 괴롭히고, 이에 대해 끊임없이 대왕이 신라에 구원의 손길을 뻗쳐준 일이 적잖이 기록되었다. 앞서 소개한 396년의 싸움 외에, 바로 3년 뒤, 신라의 왕은 고구려에 긴급히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 신라의 왕이라면 내물왕이다. 그러자 “왕은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기고,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왕의 계획을 돌아가 알리게 하였다. 다음 해, 곧 경자년(400년)에 왕이 보병과 기병을 합쳐 5만 명을 보내 신라를 구하게 하였다. 신라에 이르자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고구려군을 보자 멀리 물러났다.”고 비문에서는 적고 있다. 이는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는 기록이다. 숙신과 동부여를 친 일도 역시 대왕비에서만 나오는 사적이다. “영락 8년, 곧 무술년(398년)에 숙신을 쳐서 항복을 받고, 남녀 3백여 명을 잡아왔다. 이후로 숙신은 고구려에 조공을 바쳤다.”는 대목은 숙신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또한, “영락 20년, 곧 경술년(410년)이었다. 동부여는 옛적에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고구려에 조공을 하지 않았다. 왕이 몸소 군대를 끌고 가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부여성에 이르자, 동부여의 온 나라가 놀라 두려워하며 (항복하였다.) 왕의 은덕이 동부여의 모든 곳에 두루 미치게 되었다. 이에 개선하였다.”는 대목은 동부여에 대해 알려주는 기록이다. 광개토대왕은 왜 자신의 이름을 영락(永樂)이라 지었을까? 비문의 마지막에는 이런 일화가 나오고 있어, 그 까닭을 짐작하게 해 준다. 곧 그때까지 고구려에서는 왕릉에도 비석을 세우지 않고 있었다. 당연히 섞갈릴 수밖에 없었겠다. 벌써 열여덟 분의 왕릉이 자리 잡을 즈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은 선조 왕들을 위해 묘 앞에 비석을 세우고, 지키는 이를 기록하여 착오가 없도록 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규정을 만들었다. “묘를 지키는 이는 이제부터 서로 팔아 넘겨서는 안 되고, 부유한 이라 할지라도 또한 함부로 사들여서는 안 된다. 만약 이 법령을 위반한 자가 있으면, 판 자는 형벌을 받을 것이고, 산 자는 자신이 묘를 지키도록 하라.” 고구려의 열아홉 번째 왕으로, 영토는 넓어질 만큼 넓어졌고 나라의 기강도 세워졌으니 이제 중요한 것은 영원히 이 영화를 누리고 지키는 일이다. 조상의 이름을 기억하면서 이 나라를 대대로 크고 부강하게 이어나가자는 뜻이 광개토대왕의 이름 ‘영락’에는 들어있지 않았을까. 그는 비록 서른아홉의 짧은 나이로 세상을 떴지만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