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대통령이 5.16혁명자 명단에 박태준을 넣지않은 이유?
만약 실패할 경우 처형되는 것을 막기위함이고 그래야 장차 우리나라 군을 이끌고 갈 인재가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 있고
가신의 가족을 돌봐주어야 할 사람이 필요해서................
故 박태준의 철학·리더십 연구한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
매일경제 | 입력 2011.12.14 08:05
노쇠한 교수 목소리에서 쉰 소리가 났다. 얼마나 울었는지 수화기 저 너머 목소리에서 눈물이 배어났다.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타계 소식이 전해진 13일 송복 연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74ㆍ사진)는 매일경제신문과 인터뷰하면서 "박 회장은 한국 산업계의 히어로"라며 "큰 별이 졌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말했다.
송 교수는 박 회장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으로 한달음에 달려갔지만 유족에게 조용히 인사만 건네고 자리를 떴다고 한다.
박 명예회장은 어떤 사람이었냐는 질문에 송 교수는 "지금까지 숱하게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얼굴에서 강렬한 빛이 나는 영웅적인 상을 처음 봤다. 강(强)과 유(柔)를 겸한 대단한 사람"이라고 회고했다.
송 교수는 '태준이즘(Taejooni sm)'을 만든 사람이다. 박태준 명예회장 철학과 리더십에 대해 평생을 바쳐 연구했다.
송 교수는 "우연히 한 일간지에 박 회장이 쓴 글을 읽고 박태준이라는 인간에게 홀딱 반해 학문적으로 깊이 연구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태준이즘은 뭘까. 그는 "영국과 미국에 각각
대처리즘과
레이거니즘이 있다면 한국엔 '태준이즘'이 있다"며 "마가릿 대처 영국 총리와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 경제 철학과 정책만큼 남다른 추진력으로 포스코를 키워낸 박태준 명예회장의 리더십과 그의 독특한 사상"이라고 설명했다.
송 교수는 태준이즘으로 '절대적 절망' '불가능' '사익은 없다' 등 세 가지를 꼽았다.
그는 "박 회장은 당시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부정했는데도 절망에 빠지지 않고 포스코 전신인 포항제철을 만들어냈다"며 "박태준이라는 사람이 없었으면 오늘날 포스코는 절대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송 교수는 "삼성이나 현대와 달리 포스코는 공기업이라는 특수성을 가졌는데도 세계적 기업으로 우뚝 섰다"며 "'주인 없는 기업은 망한다'는 자본주의 정설을 깨고 주인 있는 기업 이상으로 놀라운 성취를 이뤄낸 세계 공기업 사상 유일한 사례"라고 덧붙였다.
특히 개인적 욕심 없이 공익만을 추구한 점은 태준이즘의 핵심이다.
"삼성과 현대를 키워낸 고(故)
이병철ㆍ
정주영 회장도 놀라운 성취를 이뤘지만 사적 이익 추구가 본질인 사기업을 통해 이뤄낸 성과라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고 말했다. 우리 시대에 태준이즘이 시사하는 바가 큰 것도 이 때문이다.
송 교수는 "정치인과 경영인의 리더십은 다르지만 공통점이 바로 진정성"이라며 "개인 이기심과 욕망 등 사익(私益)이 아니라 공익(公益)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박태준 회장은 사(私)보다 공(公)을 늘 우선하는 '선공(先公)주의'를 철저히 내재화했다"며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소통도 바로 진정성, 즉 태준이즘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젊은이에게도 태준이즘이 유효하다. 불가능과 절망을 얘기하며 포기하지 말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송 교수는 "태준이즘은 과거 사상이 아니라 21세기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생명력을 지닌 사상"이라고 강조했다.
[임영신 기자]
- <'철강왕' 박태준이 남긴 숱한 에피소드>
- 연합뉴스|
- 김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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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김희선 기자 = 13일 별세한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포철신화'를 일구면서 숱한 에피소드를 남겼다.
1978년 중국의 최고 실력자였던
덩샤오핑이 일본의 기미츠제철소를 방문한 자리에서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 당시 신일본제철 회장에게 "중국에도 포항제철과 같은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했다가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느냐"는 대답을 들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제철소 건설과정의 일화들도 많다.
1977년 3기 설비가 공기지연으로 고전하고 있을 때 발전 송풍 설비 구조물 공사에서 부실이 발견되자 이를 모두 폭파했던 일화는 고인의 완벽주의를 보여준다.
당시 공사가 80% 정도 진행된 상태였지만 고인은 건설현장 책임자들을 모두 모아놓고 이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면서 불량시공을 절대 허용할 수 없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여줬다.
1983년
광양제철소 호안공사 때에는 감사팀 직원들에게 스쿠버 장비를 갖추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바닷속으로 들어가 호안의 돌을 일일이 확인해 불량시공을 점검하도록 했다.
1972년 6월 제강공장의 철구조물에 대형볼트가 헐겁게 조여진 것이 발견되자 즉시 간부들을 모아 24만 개의 볼트를 일일이 확인하고 덜 조여진 400개의 볼트에 흰 분필을 칠하도록 한 일화도 전해진다.
평소 직원들에게 강조했던 '목욕론' 역시 고인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그는 "깨끗한 몸을 유지하는 사람은 정리, 정돈, 청소의 습성이 생겨서 안전, 예방 의식이 높아지고 최고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며 직원들에게 청결한 주변관리를 주문했다.
이 때문에 포철은 제철소 건설 초기부터 현장에 샤워시설을 완비했다.
hisunny@yna.co.kr
- 집ㆍ주식도 없는 청빈의 삶… 인재양성 위해선 사재도 물쓰듯
[철강신화 지다 - 인간 박태준]
타계직전엔 병원비 내기도 어려울 정도
대한중석 1년만에 흑자로… 능력 입증
41세에 포철 사장 취임 철강 인생 시작
사원주택 건립등 복지에도 남다른 관심
일본
미쓰비시는 포항제철이 일류 철강기업으로 성장하는 동안 자사의 설비가 가장 많이 사용된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고(故) 박태준 명예회장에게 특별한 선물을 제안했다. 박 명예회장이 해운회사를 설립하면 미쓰비시은행이 돈을 출자해 화물선을 건조하고 화물 알선도 책임지겠으니 그 수익금을 전액 박 명예회장이 관리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박 명예회장은 이 돈을 개인이 받을 수 없으며
포항공대를 지속적으로 키워나가기 위해 수익금 전액을 장학재단에 들어가게 하는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답했다.
결국 박 명예회장은 '화물선 건조자금은 미쓰비시은행이 좋은 조건으로 융자하고 융자금의 95%를 상환할 때까지는 제3자에게 양도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겨우 50억원의 포항제철 자금을 들여 거양해운을 만들었다. '장기융자 95% 상환' 조건은 자신이 회사를 떠난 뒤에도 이를 손대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이후 거양해운의 수익금이 포항공대로 들어가는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박 명예회장의 청렴함과 인재양성에 대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일화다.
이처럼 개인적인 치부(致富)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그는 타계 직전 자비로 병원비를 조달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청렴한 삶을 살아왔다. 김명전 장례준비위원회 유족 측 대변인(삼정KPMG 부회장)은 13일 "(박 명예회장) 본인 명의로 된 집이나 주식(포스코주식)도 하나도 없다"고 설명했다.
박 명예회장은 포항제철의 신화를 이룩한 '철의 사나이'로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의 철강산업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이끌었다. 그는 국가 기반을 다진 거물 경제인이자 정치에도 몸담은 4선 국회의원으로 국무총리까지 역임하며 '정치인 박태준'으로의 족적도 뚜렷하게 남겼다.
고인은 1927년 경남 양산 출신이다. 1933년 만 6세의 나이로 모친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수학했다. 1945년 와세다대 공대 기계공학과에 입학했으나 광복과 함께 얼마 지나지 않아 귀국했다. 이듬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2학년까지만 학업을 마치고 다시 귀국했다. 1948년 남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 6기생을 마친 뒤 한국전쟁 등을 거쳤고 육군대학 5기로 입교해 수석 졸업(1954년)하기도 했다. 부인 장옥자씨를 만난 것도 그 해다. 맞선을 본 지 한 달여 만에 결혼한 그가 부인에게 처음 받은 선물이 경제학 원론 서적이다. 그가 인생에서 경제와 처음 인연을 맺은 순간이다.
군인의 삶을 걷고 있던 박 명예회장은 1961년 5ㆍ16 쿠데타 이후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으로 발탁됐다. 같은 해 국가재건최고회의
재정경제위원회 상공담당 최고위원으로 임명돼 경제인으로 첫발을 내딛는다. '개발독재'와 '산업화'의 양면을 그리는 대한민국의 성장
드라이브를 주도하는 시발점이 이때다.
박 명예회장은 1963년 6월 한국일보에 연재된 이병철의 '우리가 잘 사는 길'을 읽으며 '
1인당 국민소득이 76달러에 불과한 가난한 대한민국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외자 도입에 의한 공업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뜻을 같이했다. 1963년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나 박태준은 정치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그는 박정희로부터 대한중석 사장을 맡아달라는 권유를 받았다. 대한중석을 1년 만에 적자에서 흑자로 돌려놓은 박 명예회장은 일본을 오가며 철의 중요성을 느꼈고 종합제철소 건설의 꿈을 키운다. 1968년 4월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영문명 POSCO) 사장으로 취임한 그는 철강인으로의 인생을 시작한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이후 박 명예회장은 일본 철강업계의 선진기술 도움과 대일 청구권 자금을 받아 포철의 일관제철소 사업을 이끌어 한국 철강산업을 반석 위에 올려놓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고인은 '철강왕'으로 한국 철강산업의 산증인으로 자리매김한다.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포항제철을 경영하며 사원 복지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최고 수준의 주택단지를 조성했다. 박 명예회장은 사원 자녀들을 위한 유치원을 포함해 초ㆍ중ㆍ고등학교를 설립했으며 1986년에는 포항공과대학교를 세웠다.
1981년 포철 초대회장에 취임한 그는
전두환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정치인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김대중-
김종필(DJP) 연합을 통해 탄생한
김대중 정부 시절(2000년) 공동정부의 자민련 몫으로 국무총리에까지 올랐다.
박 명예회장은 평소 검소한 생활로도 유명했다. 1974년 가을
관세법 위반혐의로 가택수색이 진행돼 집안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 것도 나오지 않고 장롱에는 이불과 옷이 전부였으며 금고에는 집문서와 패물 몇 가지, 해외출장의 흔적으로 남은 푼돈만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
박 명예회장은 지난달 9일 병세가 악화돼 입원해 몇 차례 수술을 받으며 회복되는 듯했으나 이달 초 다시 상황이 나빠져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다가 끝내 13일 눈을 감았다.
전문가들은 고인의 사인인 폐질환의 원인으로 석면에 무게를 두고 있다. 고인의 젊은 시절 국내 산업현장에서는 석면이 다량으로 쓰였는데 고인이 워낙 활발한 현장 경영을 펼쳐 석면에 노출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김광수기자 bright@sed.co.kr
중심’ 잃은 포스코, 탄식과 슬픔<dd class="subtitle"></dd><dd class="reporter" sizcache="49" sizset="4"></dd><dd class="toolbar" sizcache="69" sizset="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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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채명석 기자] 오너는 아니었지만 그의 카리스마는 오너의 기운을 뛰어넘었다. 포스코에서 '
박태준'을 떼어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불과 올초만 해도 그가 대치동 포스코센터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정준양 회장을 비롯한 회사 전 임직원들이 부동자세를 취할 정도였다. 그만큼 박태준
포스코명예회장의 강인한 인상은 주변을 압도했다.
이러한 박 명예회장이 지난 13일 별세 했다는 소식을 접한 포스코는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다.
창립 43년 만에 치르는 가장 큰 슬픔의 행사가 시작되자, 포스코와 관련 기관 홈페이지에는 가장 온화한 인상이라며 언론을 통해 가장 많이 알려졌던 사진을 곁들인 '짧은 인생을 영원한 조국에 한국의 철인 고 박태준'이라는 제목의 고인을 기리는 추모사가 올라왔다.
'철의 사나이. 고 박태준 명예회장 / 당신은 가셨지만 /
영일만의 황량한 모래벌판에서 / 세계적인 철강회사를 일구어 낸 / 우향우 정신과 제철보국의 각오는 / 우리의 가슴 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란 내용의 추모사는 창업주에 대한 아쉬움이 짙게 묻어났다.
이어 사내 게시판에는 연말 연시를 맞아 계획했던 각종 행사와 회식을 가능한 한 자제하라는 사측의 당부가 올라왔다. 14일부터 포스코센터와 포항과
광양제철소 등에서 근무하는 전 임직원들은 근조 리본을 달며, 빈소가 마련된 서울
신촌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까지 오지 못하는 직원들을 위해 임시 분향소도 마련키로 했다. 유족의 뜻을 받들어 조화와 부조금은 받지 않기로 했으나
이명박 대통령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등 정·관·재계·학계·종교계·언론계 등지에서 조화를 보내오고 있다.
비록 경영일선에서 손을 땐지는 오래됐지만 고인은 간접적으로 후배 경영진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하며 포스코가 현재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최고경영자(CEO) 인사의 최종 결정권자는 사실상 박 명예회장이라고 보는 게 정석이었다"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겠지만 정부 투자기업으로 출발한 포스코를 공기업으로 보고 회사를 흔들려는 권력층들이 많다보니 포스코는 늘 외부 입김에 취약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이런 압박을 몸으로 막고 포스코의 경영권 독립을 지켜준 사람이 다름아닌 박 명예회장이었다"고 말했다.
포스코 임직원들도 이러한 점을 충분히 공감하고 있다. 특히 포스코는 내년도 경영환경의 불확실성이 증대되는 가운데에서 총선과 대선이라는 정치적 이슈와 만나게 된다. 마침 2012년은 최고경영자(CEO)인 정준양 회장의 연임 여부도 걸려 있다. 다방면에 걸쳐 집중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른'인 박 명예회장의 갑작스런 별세까지 겹쳐지니 어려움은 더하다.
이를 의식해서인지 박 명예회장은 생전 유언으로 "포스코가 국가산업의 동력으로 성장한 것을 대단히 만족한다"며 "더 크게 성장해 세계 최강의 포스코가 돼 달라"고 전했다. 박태준의 포스코가 아닌 포스코인의 포스코가 돼 줄 것을 강조한 것이다.
포스코 고위 관계자는 "고인은 떠나가셨지만 그가 남긴 정신과 유산은 끝까지 이어가 세계 고의 회사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