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슐리만은 1822년 1월 6일 독일에서 가난한 시골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곱 살 때 아버지에게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그림 세계사』의 불타는 트로이 성 삽화를 보고 “아빠, 저런 튼튼한 성이 있었다면 결코 사라지지 않고 땅속에 묻혀 있을 거예요”라고 말하고, 언젠가 그것을 찾아내리라 결심했다.
슐리만은 먼저 돈벌이에 나섰다. 그는 1853년 크림전쟁과 1860년대 초 미국 남북전쟁에서 무역으로 큰돈을 벌었다. 사업을 하면서도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기 위해 1856년 그리스어를 처음 배우기 시작해 단 6주 만에 마스터했고, 이어 라틴어·아랍어도 공부했다. 그가 손대는 사업에는 엄청난 행운이 뒤따랐다. 그는 말했다. “하늘이 내 사업에 기적과도 같은 축복을 내려주신 덕분에 1863년 말 목표를 초과하는 재산을 모았다. 그래서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사업에서 손을 뗐다.” 돈은 충분히 모았으니 이제 꿈을 이룰 차례였다. 배수의 진을 치겠다는 듯 자신의 업무용 배를 모두 불태웠다.
1869년 그는 상상 속에 그려온 헬레네 왕비처럼 아름다운 그리스 여성과 결혼했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남매의 이름은 아가멤논과 안드로마케(트로이 왕자 헥토르의 아내)였다. 두 사람은 합심해 호메로스의 나라를 찾는 일에 발 벗고 나섰다. 트로이 발굴 작업은 1870년 4월 시작됐다. 늪지대의 모기 때문에 말라리아가 창궐했고, 깨끗한 물도 부족했다. 인부들은 고분고분하지 않았고, 행정기관의 업무 처리는 굼뜨기만 했다. 호메로스 이야기의 역사성을 의심한 학자들은 그를 바보 취급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슐리만의 열정을 꺾지 못했다. 마침내 트로이가 실재했던 성이며 호메로스가 실존 인물임을 밝혀냈다. 1873년 슐리만의 발굴 기사가 언론에 보도되자 유럽은 엄청난 흥분에 휩싸였다. 학자든 일반인이든 만나는 사람마다 온통 트로이 이야기였다.
그러나 슐리만은 정작 소년 시절 꿈을 키운 조국 독일에서 인정을 받지 못해 괴로워했다. 학자들은 그가 아마추어라는 이유로 공격했다. 성공한 ‘아웃사이더’에 대한 ‘전문가’의 불신이었다. 물론 슐리만의 서툰 작업 방식으로 일부 유물이 파괴됐고, 그의 연대 확인도 대부분 오류로 판명되긴 했다. 그러나 그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트로이 문화’ 자체를 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스를 사랑한 이 몽상가의 장례식은 그리스 국왕과 각료들이 참석한 가운데 아테네에서 치러졌다. 모쪼록 이 나라의 청년들도 젊은 날의 꿈을 길이 간직하길.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