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바람, 그리고 새로운 미래에 대한 차분한 모색.’ 2009년의 세계경제를 평가하고 2010년 경제를 전망한 올해 다보스포럼을 지켜보고 난 뒤 필자의 머릿 속에 남은 말이다. 특히 2008년 금융위기를 넘어 경제회복기에 접어든 지금, 세계의 지도급 인사들이 어떤 고민을 안고 있으며 어떤 미래를 설계하고 있는지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다보스 사람(Dabos Man)’이라는 말이 있다. 다보스포럼의 이미지를 함축적으로 시사하는 이 말은 결국 매년 이 포럼에는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만 모인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돈과 힘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다보스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하나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자유자본주의(free capitalism)에 대한 신념이다.
사실 다보스포럼은 시장경제와 세계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생각의 흐름 위에 서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포럼이 탈규제와 민영화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 것 역시 이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네트워크의 장’이라는 다보스포럼의 출발을 되짚어보면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애초에 이 테이블을 가능케 하고 성공으로 이끈 것은 제창자 클라우스 슈밥 교수의 뛰어난 전략 구상이었다. 그는 우선 세계적인 금융자본가들을 다보스에 끌어들였다. 그러자 이들을 만나 투자를 받기 원하는 산업자본가들이 따라 나왔고, 이들이 모이자 미디어가 관심을 갖게 됐고, 주목받기 원하는 정치가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인맥 구축과 아이디어 교환의 장이라는 특징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바쁜 사람들이 1만8000유로라는 등록비를 내면서 해마다 한자리에 모이는 이유고, 지난 40년간 다보스포럼이 성장을 거듭해온 배경이다.
그러나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는 이러한 기본 틀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시장과 기업, 이윤을 우선시하고 빈곤 퇴치나 복지는 그 다음 이슈로 생각했던 담론 구조에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그러한 모습의 자본주의가 과연 옳은가, 과연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있는가에 대한 회의가 힘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국가의 감독과 규제가 배제된 시장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가시화되면서 국가와 시장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는 논의도 수면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올해 다보스포럼의 주제는 ‘다시 생각하고, 다시 디자인하고, 다시 구축하자(Re-think, Re-design, Re-build)’로 모아졌다. 기존의 자본주의 시스템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하자를 다시 검토하고 재설계해 문제점을 최소화해 새로운 체제를 구축하자는 것이 이른바 ‘3R’의 정신이다. 이를 위한 여섯 가지 하부 주제, 즉 새로운 가치를 가진 프레임워크 설정, 지속 가능한 사회 유지, 사회복지체계의 강화, 글로벌 리스크와 시스템 실패의 관리, 인간안보 향상, 이러한 주제를 효과적으로 집행할 글로벌 거버넌스 구축방안 등은 모두 다보스포럼에 불어온 새로운 바람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중국 인도의 확연한 부상
물론 전반적인 분위기는 2009년 포럼의 암울함과는 사뭇 차이가 있었다. 전대미문의 금융위기 앞에서 우왕좌왕하는 것이 지난해의 모습이었다면, 세계경제가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한 시점에서 열린 올해의 포럼은 차분하게 문제의 근본을 들여다보겠다는 태도가 역력했다. 지난해 대거 불참했던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 바클레이스은행 등 세계적인 투자금융회사의 거두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도 차이가 있었다.
특히 지난해 포럼의 위기라는 말까지 낳았던 아랍-이스라엘 분쟁 같은 민감한 국제정치 이슈들은 대부분 의제에 포함되지 않았다. 과도한 정치적 쟁점이 포럼의 본래 목적인 경제문제에 대한 초점을 흐릴 수 있다는 주최 측의 염려가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1년 전 포럼을 휩쓸었던 미국 책임론도 상당부분 사그라졌고, 대신 중국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나타났다. 중국 역시 리커창 부총리와 주민 인민은행 부총재 등 차세대 주자들이 대거 참석해 이러한 관심에 부응하는 모습이었다. 가디언지(誌)의 한 기자가 이를 두고 “중국 관련 세션에는 입추의 여지가 없지만 미국이나 유럽 관련 토론에는 빈자리가 많았다”고 언급할 정도였다.
중국과 함께 인도의 부상도 눈에 띄었다. 인도는 총리를 제외하고는 경제 관련 내각 구성원 전원이 참석한 듯했다. 브라질 역시 각광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룰라 다 실바 브라질 대통령은 다보스포럼이 올해 처음 제정한 최우수정치지도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무는 미국과 유럽의 시대, 떠오르는 중국과 인도, 브라질의 시대라는 이른바 ‘세력전이’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참여한 미디어들의 면면에서도 드러났다. 지난해에는 CNN, CNBC, BBC 같은 서방언론이 중심이 됐다면 올해는 중동의 알아라비아와 중국 CCTV, 일본 NHK 등 다른 지역의 언론들이 광범위한 인터뷰와 심층 보도를 통해 적극적으로 포럼에 개입했다. 하버드와 MIT, 펜실베이니아주립대, 시카고대 등 여러 대학이 자신들의 최첨단 연구주제를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국 대학들의 참여가 아쉬웠던 것도 또 하나의 특징이었다.
매년 다보스포럼의 최대 관심사는 단연 그해 경제상황에 대한 예측이다. 지난해 포럼에서는 비관적인 전망 일색이었다면 올해는 참석자들에 따라 사뭇 엇갈리는 견해를 내놓았다.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는 여전히 비관적인 관점을 유지하면서 미국의 금융규제가 아직 미흡하다고 일갈했다. 라구람 라잔 시카고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보호무역주의의 창궐을 우려했고, 제라드 리용 스탠더드차터드은행 수석이코노미스트는 비관과 낙관을 넘어서는 현실주의를 주장했다. 반면 다케나카 헤이조 전 일본 경제재정상은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의 경제성장이 2010년의 대세가 될 것이라며 낙관론을 펼쳤다.
이렇듯 엇갈리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대세는 ‘2010년이 뉴 노멀(New Normal)의 시작이 될 것’이라는 담론이었다. 각국 정부의 엄청난 부채와 재정부문의 취약성이 경제의 불확실성에 대한 경계심을 고조시키고 있고, 이에 따라 이제 과거와 같은 고도성장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시각이다. 금융부문이 실물경제와 유리되어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과거 탈규제 경제시스템의 고도성장 패턴, 이른바 ‘올드 노멀(Old Normal)’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다. 각국 정부가 시장에 적극강적으로 개입하는 고강도 규제 정책에 따라 저성장이 영구적으로 이어지면서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는 로버트 다이아몬드 바클레이스은행 행장의 분석이 대표적이다.
출구전략에 관한 논의도 이와 관련해 이뤄졌다. 과감한 재정투입과 초저금리 정책으로 부양해온 경기회복이 아직 불안정한 상태이므로 각국 정부는 출구전략의 시행을 유보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렇듯 취약한 경제시스템으로는 과거와 같은 불꽃 튀는 경기 활성화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제 저성장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꾸준한 부양정책을 유지하며 적응해나가야 한다는 골자다. 섣부른 과거 정책으로의 회귀가 세계적인 더블딥(이중침체)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깔려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2010년 경제전망
외신에도 보도됐지만, 이번 포럼의 단연 핫이슈였던 정부와 시장의 관계, 금융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 문제 역시 이와 관련이 깊다. 오바마 행정부가 이번 포럼을 앞두고 공격적으로 천명한 금융구제 정책, 이른바 ‘폴 볼커 룰’에 대한 논쟁이 그것이다.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분리, 은행 규모의 제한 등을 주축으로 하는 미국의 금융규제정책에 대해, 포럼에 참가한 다국적 금융회사 대표들의 저항은 사뭇 거셌다. 과도한 금융규제가 경제회복을 늦춰 공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반면 전설적인 투자가 조지 소로스가 사실상 이러한 조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더 강한 규제를 주문한 것은 특기할 만한 대목이다.
결국 이를 둘러싼 논의는 금융규제가 세계적인 경기침체로 연결될 수 있다는 비판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시작이 부실한 금융규제 때문이 아니었느냐는 반박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구도로 진행됐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경제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금융규제 이슈에 대해 앞으로도 쉽지 않은 논쟁이 계속될 것임을 보여주는 토론이었다.
고용 없는 성장의 그림자
필자의 눈에 들어온 올해 포럼의 또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이슈는 경제회복과 복지회복의 차이에 관한 것이었다. 래리 서머스 백악관 수석보좌관이 포럼에서 지적했듯 통계상으로는 분명 경기가 회복됐지만 사람들이 체감하는 경기는 다르다는 것이다. 미국만 해도 노동생산성이 가장 높은 24~54세 인구의 실업률이 20%를 넘어서고 있다. 5%에 불과했던 1960년대와는 구조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경제는 회복돼도 고용은 회복되지 않는 패턴이 정착하고 있으므로 이에 따라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에 대해 유념해야 한다는 분석이 쏟아졌다.
세계경제의 흐름이 서구에서 브릭스(BRICs)와 아시아로 움직이고 있다는 세력전이론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대세로 느껴졌다. 그 중심에 해당하는 중국과 인도의 부상, 여기에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의 가세는 대부분의 서방 측 참석자들이 인정하는 대목이었다. 파스칼 라미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은 “한국과 일본의 경제회복이 더디게 이뤄진다 해도 중국 등이 보여주는 8% 이상의 급속한 성장이 세계경제의 엔진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오히려 중국 측 참석자들이 이러한 시각에 대해 경계하고 나섰다는 사실이다. 데이비드 리 칭화대 교수는 “국가총량으로는 중국의 부상이 눈에 띌지 몰라도, 1인당 국민소득으로는 2000~3000달러 수준으로 세계 100위권에 불과하다”며 반론에 나섰다.
그러나 이는 중국에 대한 세계의 주목을 경계하고자 하는 이른바 ‘도광양회(韜光養晦·재능이나 명성을 드러내지 않고 참고 기다린다는 뜻)’의 발로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지난해 세계 경제성장의 75%가 아시아 요인에서 발생했다는 통계는 세력전이의 흐름이 단순한 담론을 넘어 현실화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아시아 국가들의 GDP는 이미 유럽을 능가했고 G20(주요 20개국)에서 아시아 국가들의 역할도 빠른 속도로 확대되고 있다는 점도 반증하기 어려운 대세다.
지금까지 올해 다보스포럼의 큰 흐름을 살펴보았다면, 이제부터는 포럼의 6대 주제, 250여 개 세션을 통해 세부적으로 논의됐던 내용을 들여다보기로 하자. 가장 먼저 볼 것은 이른바 가치(value)의 문제다. 포럼 주최 측이 미국 등 10개국에서 1만2000여 명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세계인의 67%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윤리와 가치의 위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정직과 성실, 투명성 같은 근본적인 가치들이 흔들리면서 경제위기를 낳았다는 것이다.
2009년 전 세계적으로 실시된 조사는 세계적인 기업을 이끌고 있는 CEO들에 대한 세계 시민의 신뢰가 2008년 36%에서 2009년 29%로 떨어졌다고 보고하고 있다. 신뢰가 없으면 시장경제가 제 기능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를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세계 경제의 당면과제라는 게 관련 토론의 결론이었다.
신뢰의 회복과 자본주의의 재구성. 카우보이 금융자본가들이 휘두르는 기존의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 바로 가치 이슈가 담고 있는 문제의식의 핵심이다. 노동자들의 임금에 비해 CEO들의 임금이 수백 배에 달하는 현실에 대해 많은 국가에서 비판의 칼날을 세우고 있는 것도 이와 관련이 깊다. 대표적인 투자금융회사인 골드만삭스 영국지사는 CEO의 봉급을 100만파운드로 제한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이 같은 흐름에 저항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지만, 규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다수의 공감을 얻고 있음은 분명해 보였다.
문제는 불신이다
결국 자본주의의 문제를 윤리에서 찾는 이 같은 기조는 가족과 종교, 교육의 힘을 다시 반추하는 분위기로 이어졌다. CEO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각이 바뀌고, 제도 역시 인간의 탐욕을 경계하는 방향으로 재정립되어야만 새로운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포럼 전체에 걸쳐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모습이었다.
우리가 맞닥뜨린 위기는
다음으로 위기관리라는 주제 역시 흥미로운 논점을 많이 만들어냈다. ‘불확실성’에 대한 일반적인 접근법에 2008년의 금융위기를 대입해 풀어보면 포럼에서 설명하는 리스크 관리 실패의 핵심이 무엇인지 비교적 명확하게 눈에 들어온다.
우선은 문턱(threshold) 효과다. 어떤 패턴, 특히 수학적 파생의 연쇄고리로 순환 연결돼 있는 패턴은 일정 수위를 넘어서면 갑자기 그 증가세가 폭발적으로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시간차(lag-time) 효과 또는 복잡계 이론에서 이야기 하는 나비효과다. 지금 벌어진 일이 즉각적으로는 큰 영향이 나타나지 않아도 나중에 엄청난 폭풍이 되어 밀어닥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시너지 효과다. 1+1이 단순히 2가 아니라 5, 6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위기관리에 실패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2008년의 금융위기는 모두 미국의 금융자본과 당국이 이러한 위기관리의 근본적인 원칙을 간과했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세계경제의 상호의존성이 극대화된 현재 상황에서 이러한 위기관리의 기본원칙을 끊임없이 상기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부분과 부분의 역학관계를 정확히 꿰뚫어보지 못하면 세계경제의 위기는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중국의 부동산버블 붕괴 등 자산가격의 급격한 하락이 벌어진다거나, 중국의 경제성장률이 6% 이하로 떨어질 경우 글로벌 경제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 등이 이번 포럼에서 논의된 2010년의 주요 리스크 사례였다.
또 하나의 위기요인으로 지목됐던 유럽국가들의 재정불안 문제는 포럼이 끝난 직후 그리스발(發) 폭풍으로 고스란히 현실로 나타나기도 했다.
여기에 조류 인플루엔자와 신종 플루 등 세계적인 전염병 유행과 병원체의 전파 역시 세계가 경각심을 유지해야 할 리스크로 거론됐다. 사회간접자본시설에 대한 투자가 둔화되는 흐름도 자연재해가 벌어졌을 때 위기를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최근 국내에서 에너지문제 해결의 대안으로 각광받고 있는 원자력 문제가 이번 포럼에서는 위기요인의 하나로 다뤄진 것 역시 눈여겨볼 대목이다. 기후변화 문제로 인해 최근 일고 있는 전세계적인 원자력 붐이 안전관리나 핵폐기물 보관 등과 관련해 새로운 리스크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의 눈에 흥미로웠던 또 하나의 세부주제는 안보 문제였다. 특히 논의의 주된 흐름이 군사안보로 상징되는 기존의 개념에서 벗어나 인간안보로 옮겨가고 있다는 점이 가장 특징적이었다. 안보 이슈에 관한 9개 세션 가운데 전통적 안보 개념으로 볼 수 있는 것은 핵 비확산 정도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비전통적인 인간안보 분야의 주제였다.
국제사회가 실패국가의 국민을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가 같은 주제가 대표적이다. 아이티 참사나 아프가니스탄, 과거 르완다처럼 개별국가가 자국민의 안전을 책임질 수 없을 때는 국제사회가 이를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 그 주된 논점이었다. 안보 문제를 여전히 군사적인 관점에서만 해석하는 우리의 시각은 세계의 주된 흐름과 사뭇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절감케 하는 토론이었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눈여겨봤던 세부주제로는 세계경제를 관리하는 국제체제의 효율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이슈가 있다. IMF(국제통화기금)로 상징되는 기존의 국제기구가 가진 방만함과 관료주의를 극복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치열한 논의가 진행됐다. 여기서 제기된 아이디어 가운데는 IMF의 운영을 G20 중심으로 재편해야 한다는 안이 있었다. 지분율이 16.25%에 불과한 미국이 IMF의 의사결정과정에서 거부권을 행사하는 현실이나, 유럽의 지분율이 지나치게 높은 데 비해 브릭스(BRICs) 등 신흥경제권의 영향력은 극히 작다는 비판도 나왔다.
한편 이번 포럼을 통해 한국의 위상이 크게 부각됐다는 사실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1월27일 특별연설을 통해 ‘G20 합의사항 철저 이행, 국제 개발격차 해소를 위한 노력과 글로벌 금융안전망 구축, 개발도상국 비회원국들에 대한 아웃리치 및 비즈니스 정상회의’라는 11월 G20 정상회의의 기본 방향을 제시해 참석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1월28일 ‘한국의 밤’ 행사가 같은 시간대의 일본이나 중국의 밤보다 성황리에 개최된 것도 고무적이었다.
한국 앞에 놓인 두 개의 어젠다
여담이지만 이번 포럼 기간 한국과 캐나다 두 정상 사이의 묘한 경쟁관계가 엿보였던 것 역시 흥미로운 기억으로 남는다. 한국이 과감한 재정투입으로 불황을 신속하게 극복한 국가라는 점에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면, 캐나다는 G7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과감한 금융개혁과 국가부채 해소에 성공해 안정적인 체질개선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위기에 임하는 두 나라의 사뭇 다른 해결방식은 포럼 기간 내내 많은 이의 입에 오르내렸다.
상근직원만 300여 명에 달하는 다보스포럼은 산하에 1400명의 저명인사가 참석하는 76개의 글로벌어젠다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다. 전세계가 당면한 모든 핵심현안에 대해 세계 최고수준의 전문가 그룹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있는 것이다. 이들 위원회는 매년 11월 두바이에 모여 아이디어를 조율해 이듬해 1월말 열리는 다보스포럼의 어젠다를 선정한다. 당연히 올해의 어젠다도 이러한 과정을 통해 결정됐다. 필자가 위원장을 맡고 있는 한국미래아젠다위원회는 이 산하 위원회 가운데 하나다.
이번 포럼에서는 한국미래아젠다위원회가 제시한 ‘사회적 책임을 같이하는 녹색성장(Green, Responsible, Growth)’ 제안이 공식 어젠다로 채택됐다. 친환경적으로 성장하되 고용과 복지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포함하는 성장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 주된 테마다. 비록 이상론에 가까운 목표이긴 하지만, 자원사용은 50% 줄이되 경제적 가치는 50% 늘리고 일자리도 20% 증가시키는 이른바 ‘50-50-20’ 제안을 핵심개념으로 한다.
한국미래아젠다위원회의 제안에는 이를 위해 녹색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전문 중소기업을 뒷받침할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실천방안도 포함돼 있다. 이렇게 개발된 녹색 기술을 전세계가 공유해나가고, 또한 에너지를 적게 소비하는 사회적 패러다임을 형성해나가는 작업을 다름 아닌 한국이 주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이명박 대통령이 최근 ‘글로벌아시아’지(誌)를 통해 발표한 “한국이 솔선수범을 통해 녹색 기술의 허브가 되어 기술을 가진 국가와 못 가진 국가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겠다”는 구상과도 맞닿아 있다.
이번 포럼에서 한국미래아젠다위원회는 이 제안을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기회를 가졌고, 오는 5월말 카타르 도하에서 열리는 글로벌 어젠다 정상회의에서는 정식으로 의제화될 예정이다. 이는 다보스포럼이 녹색 성장을 세계적 운동으로 전개하기 위한 한국 정부의 노력에 적극 동참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하나의 산하 위원회인 21세기안보 아젠다위원회는 ‘G20 힘 실어주기(Empowering G20)’ 제안을 통해 11월 서울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 기간에 경제나 금융뿐 아니라 안보분야도 다루자고 제안하고 있다. 비효율적인 유엔 안보리 논의의 한계와 강대국 중심의 질서에서 벗어나, 주요 20개국이 민주적 원칙 아래 비전통적 안보 협력 문제를 함께 논의하자는 주장이다. 서울 G20 정상회의가 열리는 시점에 이와는 별도로 한국 정부가 각국의 고위급 안보보좌관을 초청해 회의를 개최하자는 게 그 골자다. 이 제안 역시 5월 카타르 정상회의에서 의제로 채택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갈 길이 멀다
이렇듯 이번 다보스포럼에서 한국은 최소한 두 가지 세부 어젠다에서 참석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우리 정부가 국제사회와 협력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진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반면 경제와 정치, 예술과 학문이 어우러지는 다보스포럼의 한국 측 참석자나 발표자가 극히 제한돼있음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앞서 말한 중국이나 인도의 적극적인 참여와 비교해보면 더욱 그렇다. 각국 국가원수들이 패널의 한 사람으로 토론에 참석하고 토론 후에도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이 국제적 네트워크의 장에서 한국의 영향력이 아직 미약하다는 사실은 분명 씁쓸한 대목이다.
올해 다보스포럼에서 본 한국은 아직 갈 길이 멀고 할 일도 많아 보인다. IMF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해낸 모범국가지만, 여전히 국제사회에서 자국의 이미지를 드높이기 위한 적극적인 행보는 부족한 상태라고 할까. 그러나 한국이 동아시아의 작은 분단국가라는 낡은 틀을 깨고 지구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국제적 위상과 지위를 한발 한발 찾아나갈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만큼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변화하는 세계의 흐름과 새로운 자본주의 시스템을 구축해가는 논의 과정에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친환경적 경제성장이라는 구체적인 어젠다를 주도해나갈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이다. 2011년 다보스포럼에서는 한층 달라진 한국의 모습을 기대하는 바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 cimoon@yonsei.ac.kr |